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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깨졌습니다 불 꺼지는 아이디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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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패션 관련 창업을 준비 중인 김모(17·경기도 용인시)군은 지난달 초 학교에서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김군이 청소년 창업 멘토링 캠프에 참가하겠다고 결석사유서를 제출하자 교무실 곳곳에서 “공부나 하지 창업은 무슨 창업이냐”는 핀잔이 쏟아진 것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왔으면 대학 가는 게 제일 먹고살기 편한 길이다”“창업할 거였으면 처음부터 공고나 상고를 갈 것이지, 인문계고에 왜 왔냐”는 등 창업의 꿈을 꺾는 훈계는 계속 이어졌다. 그 후 김군은 선생님들 앞에서 창업 얘기는 아예 꺼내지 않는다. 대신 한국청소년창업협회 같은 외부 단체에서 교육을 받으며 몰래 창업의 꿈을 키우고 있다. 김군은 “‘딴짓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부모님에게도 현재는 비밀”이라며 “빌 게이츠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업을 시작했다지만 한국과 같은 분위기에 태어났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4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막을 올린 ‘2013 대한민국 벤처·창업 박람회’에는 창업에 관심 있는 인파 3500명이 몰려 북적거렸다. 하지만 박람회장 한쪽에 마련된 상담관은 한적한 모습이었다. 주요 전시관을 둘러보며 꼼꼼히 메모를 하다가도 상담관 앞에선 이내 발길을 돌리곤 했다. 박람회 관계자는 “창업에 대한 정보를 얻으러 온 사람은 많은데 실제 행동에 나서는 것을 아직 주저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창업을 생각하고 있다는 박모(32)씨는 “여러 가지 창업 관련 아이디어는 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주변에서 창업을 했다가 낭패를 본 경우를 자주 봐서 아직까진 창업에 나서기가 두려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창업 국가’라는 구호가 요란하지만 한국의 창업 환경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4일 한국과학창의재단의 한·중·일 ‘창의인식 비교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은 창업 하면 ‘실패’나 ‘위험’ 같은 부정적인 단어를 먼저 떠올린다. 한국청소년창업협회 김남경 회장은 “창업을 한다고 하면 ‘객기 어린 도전’이나 ‘철이 없다’며 폄훼하는 시선이 많다”며 “그러다 보니 위험을 감수하고 혁신을 시도하는 젊은이들마저 창업을 꺼리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요즘 대학가는 취업 또는 자격증 공부에 올인하는 ‘취업 준비반’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모험과 도전보다는 안정에 더 큰 의미를 두다 보니 창업보다는 대기업·공기업 취직에 목을 맨다. 간혹 창업에 뛰어들어도 대부분은 ‘1회성’에 그치곤 한다.

 지난해 대학연합 창업동아리 회원들과 모바일 쇼핑 애플리케이션(앱) 창업에 뛰어들었던 권모(26·고려대)씨는 현재 사업을 접고 영어와 상식 공부에 열중이다. 함께 창업을 준비했던 멤버 6명 중 5명도 권씨처럼 취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권씨는 “다시 도전해도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섣불리 재도전하기가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서울대 재료공학과 홍국선 교수는 “학생들이 취업 스펙쌓기용으로 창업 동아리에서 잠깐 활동한 후 ‘잠수’를 타는 일이 빈번하다”며 “정말 창업을 하고 싶은 다른 학생들의 의지까지 꺾게 된다”고 말했다.

 이는 일반 직장인도 마찬가지다. 창업에 대한 두려움과 제도적 지원이 미흡하다 보니 다니던 직장을 나와 창업한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벤처(Venture) 창업은 결국 벤치를 떠돌아다니는 노숙자가 된다는 의미에서 ‘벤처(Bencher)’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하지만 중국의 분위기는 한국과 사뭇 다르다. 이번 한·중·일 조사에서 중국은 창업 의식이 가장 앞서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달 말 중국 베이징 중관촌에 위치한 창업카페인 ‘처쿠(車庫)’는 예비 창업자로 가득했다. 이곳에서 만난 베이징대 졸업생 이용(李勇·29)씨는 두 번째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앱을 통해 각종 상품의 구매를 대행해 주는 서비스를 창업 아이템으로 잡았다. 그는 “처음에는 서비스 대상을 중국 내로만 한정하다 보니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해외 품목까지 대상을 확대했다”며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실패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소셜미디어 회사인 소셜터치의 장루이 최고경영자(CEO)는 “백만장자가 된 벤처기업인이 쏟아져 나오면서 중국 사람들이 창업을 통해 성공을 꿈꾸는 게 일상화됐다”며 “중국에서는 공무원을 최고의 직장으로 꼽지만 최근에는 명문대 졸업생들이 대거 창업에 나설 정도로 기업가의 인기도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에 한국은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창업에 따른 실패에 관대하며 재도전이 용이하다’는 데 동의하는 응답이 중국·일본에 못 미친다. ‘창업=실패’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게 원인으로 꼽힌다. 실패 가능성이 높은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국에선 실패한 데 따른 부담과 대가가 큰 탓에 창업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유독 높은 편이다. 벤처 1세대 창업자인 남민우 다산네트웍스 대표이사는 “창업에 실패하면 본인이 인생 낙오자가 되는 것은 물론, 연대보증을 통해 주변 사람까지 빚의 굴레를 씌운다”며 “실패 후 재기까지 패자부활이 힘든 한국의 창업 환경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일본만 해도 실패의 경험을 소중히 여긴다. 기업과 조직에 ‘실패학’ 신드롬이 일기도 했고, 아직도 실패학과 관련된 서적이 인기를 끌고 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 실패를 연구해 집단의 지혜를 얻자”는 게 실패학의 주창자 하타무라 요타로 도쿄대 명예교수의 얘기다. 한양대 에리카 캠퍼스의 김우승 교수는 “좋은 아이디어가 사업으로 이어지고, 실패의 경험이 창업의 밑거름이 되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국도 창업이 활발해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이 ‘무게중심’을 두는 것은 기업가정신에 대한 교육이다. 국·영·수 위주의 지식교육은 한계가 있다. 중·고교 시절부터 기업가 정신에 대한 교육을 병행하는 등 교육 전반에 걸친 창업교육을 활성화해야 창의·도전 정신을 불어넣는 풍토가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2002년부터 시작된 청소년 창업경제 교육인 ‘비즈쿨’을 운영하고 있는 곳은 지난해 말 현재 124개 학교에 불과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운영하고 있는 곳은 각각 10곳씩 20곳뿐이다.

 한국엔젤투자협회 고영하 회장은 “어려서부터 창업을 꿈꾸는 선진국과 달리 우리 청소년 가운데 창업이 꿈이라는 아이들이 있느냐”며 “미국이나 유럽처럼 초등학교 때부터 기업가 정신을 심어주고, 대학까지 정규 교과를 통해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시스템이 확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베이징=손해용 기자, 서울=박수련·조혜경 기자

어떻게 조사했나

▶조사대상: 한·중·일 각 1000명

-한국: 전국 19~69세 성인 남녀
-중국: 베이징, 상하이, 톈진, 광저우, 선전, 충칭 20~69세 성인 남녀
-일본: 도쿄, 요코하마, 나고야, 오사카, 교토, 고베 20~69세 성인 남녀

▶ 표본 추출 방법: 지역/성/연령별 인구 비례 무작위 추출

▶표본 오차: ±3.1%포인트(95% 신뢰수준)

▶ 조사 방법: 한국: 1:1 개별 면접 조사, 중국·일본: 온라인 조사

▶조사 기간: 11월 1~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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