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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원 보이스 아니면 노 보이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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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화려한 연말의 런던 도심부에서 한발 비켜선 곳에 랜스다운클럽이 있었다. 250년 된 건물답지 않게 잘 관리된 외벽엔 1780년대 총리를 지낸 랜스다운 후작과 1920년대 백화점 소유주로 이름난 해리 셀프리지가 살았던 곳이란 표지가 붙어 있었다. 이른바 ‘명소’였다. 우리에겐 그러나 그 이상인 곳이었다.

 101년 전인 1902년 1월 두 남자가 이곳에서 외교문서에 서명했다. 서구의 강대국과 동양의 한 나라가 처음으로 대등하게 체결한 조약으로 알려진 영일 동맹이었다. 일본엔 이게 아시아 강국으로 크는 발판이 됐다. 2년 뒤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는데 청일전쟁에서 이기고도 러·불·독의 간섭에 의해 ‘전리품’을 내놓아야 했던 외교적 패퇴를 9년 만에 앙갚음한 것이었다.

 우리에겐 재앙이었다. 고종은 체결 사실을 인지한 뒤 나흘 만에 내각을 개편했다. 위기로 느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 뒤 러·불 동맹이 뒤따르자 조선의 중립화 가능성이 커졌다고 오판했다. 실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후의 일을 곱씹기 위해 랜스다운을 찾은 게 아니었다. 생각은 그전을 향해야 했다.

 일본은 동맹국으로 영·러를 놓고 저울질하다 영국을 택했다. 그 과정에서 격렬한 토론이 있었다. 당시 일화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대러 협상을 우선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그가 러시아 방문을 결정하자 총리가 독단적인 전횡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고 이토는 “그런 잔소리를 한다면 외유를 관두겠다”고 역정 냈다. 이토가 의도했든 안 했든 그의 방러는 영일 동맹을 앞당기는 성과를 거뒀다. 영국에서도 19세기 초 아시아에서 3000㎞였던 영·러 간 거리가 19세기 말 수백㎞로 줄어든 현실에 대처해야 했다. 독·일과의 3국 동맹을 고심하다 결국 일본을 택했다. 예나 지금이나 집단적이고도 냉철한 국익 계산은 외교의 요체다.

 요즘 세계 열강이 각축을 벌이던 구한말을 떠올리는 이가 많다. 양차 대전으로 귀결된 독일·러시아의 부상을 연상하는 이도, 2400년 전 공멸로 이어진 아테네·스파르타의 경쟁을 거론하는 이도 있다. 십분 공감한다. 강대국 간 세력 변화가 긴장을 초래한다는 건 일반 이론이다.

 ‘반일(反日)’이 국민운동이 된 지금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은 개별 국가의 주권에 관한 사안으로 유엔헌장도 권장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 미군을 주축으로 한 50만 명 이상의 유엔군이 작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일본의 후방 기지가 있었기 때문”(공로명 전 외무장관)이란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나오는 건 그만큼 민간의 상황 인식이 위중하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정작 외교 당국은 어떤지 모르겠다. 내부 역량을 결집하고 있는 중인지도 참으로 알기 어렵다. 외교안보 전문가인 여권 인사 A의 말이 떠올랐다.

 “10월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미국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일본 욕만 했다더라. 미국의 동태도 눈치채지 못하고. 미국은 우리가 ‘원 보이스(one voice) 아니면 노(no) 보이스’라며 놀라더라.”

 대통령이 말한 일에 대해선 대통령과 똑같이 말하고 대통령이 언급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선 아무 말도 못한다는 뜻이었다. 독자 행동 때문에, 말 때문에 날아간 것으로 알려진 최대석 전 인수위원과 서호 전 남북 실무회담 수석대표의 이름이 순간 스쳤다. 그는 계속 말했다.

 “청와대든 외교부가 워싱턴·베이징·도쿄의 현장과 거리가 있다. 대통령의 인기에, 정상과의 친분에 안주하는 것 같다. 이미 그 사람들은 우리를 예전처럼 살갑게 대하지 않는다.”

 새누리당 의원 B는 땅이 꺼졌다. “외교를 누가 하는 거냐. 외교안보수석은 이름도 생각이 안 나네….”

 사위(四圍)는 이제 어둠뿐이다. 그러나 기억 속에 그들의 목소리만큼은 아니었다. <런던에서>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