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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부가 거부가 되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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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승희
워싱턴 총국장

미국은 싱크탱크의 나라다. 싱크탱크는 미 정부와 의회에 정책을 제안하거나 여론을 형성해 정부 정책까지 바꾼다. 그래서 제5의 권력이라고 불린다. 미국의 싱크탱크 수는 지난해 기준으로 1823개다. 중국이 429개, 일본이 108개인 것과 비교해봐도 압도적이다.

 미국이 싱크탱크의 천국이 된 이유를 지난달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를 방문해 실감했다. 1962년 조지타운대에서 출발해 역사가 50년이 넘는 CSIS는 오랜 K스트리트 생활을 청산하고 워싱턴 로드아일랜드 애비뉴에 9층짜리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CSIS의 새 건물을 둘러보던 중 널찍한 회의실 입구에 이나모리 아시아센터란 명패를 발견했다. 안내원은 일본에서 살아있는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교세라 명예회장의 이름을 땄다고 설명했다. 이나모리 회장은 CSIS의 공동 설립자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중도 성향으로 의회에 영향력을 키우는 CSIS가 일본 문제에서 발언이 센 이유다. 지난 2월 미국을 방문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재팬 이스 백(일본이 돌아왔다)”이라는 연설을 한 곳도 CSIS다. 이나모리 아시아센터 옆에 작은 회의실이 있었다. 반갑게도 두산 룸이란 명패가 붙었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기부를 해 그 액수만큼의 면적을 할애해 꾸몄다고 한다. 하지만 이나모리 센터와 두산 룸의 규모는 생각에 투자하는 일본 기업과 한국 기업의 스케일 차이를 보여줬다.

 미국은 501(C)(3) 규정에 의해 비영리 기구들에 연방세 면세 혜택을 준다. 싱크탱크에도 이 규정이 적용된다. 그러다 보니 개인이나 기업은 싱크탱크에 흔쾌히 기부하고, 싱크탱크들은 그들의 이름을 회의실 등에 붙여 기부의 선순환을 유도한다. 미국 제1의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는 1년 예산이 8890만달러(약 1026억원)인데 80% 이상이 기부금이다. 미국에선 싱크탱크가 고위 공직자 배출소로도 유명하다. 딕 체니 전 부통령은 보수적인 싱크탱크 AEI(미 경제연구소) 출신이고, 수전 라이스 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브루킹스 연구소의 연구원 출신이다. 헨리 키신저·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 외교 거물들도 퇴임 후 CSIS 이사를 지냈다. 싱크탱크가 보이지 않는 로비의 끈인 셈이다.

 한국은 어떤가. 세계 12위 경제대국이라는 한국의 기업들은 싱크탱크 투자 면에서 인색하기 짝이 없다. 경제력과 비교해 ‘생각기구’들의 규모도 빈곤 수준이다. 싱크탱크라고 할 만한 연구소는 대부분 정부 산하고, 대기업 연구소들까지 합쳐봤자 방글라데시와 같은 35개에 불과하다. 그나마 민간 기구로 아산정책연구원이 영역을 넓혀가는 정도다. 다양한 이념과 정책의 산실인 싱크탱크는 한 나라의 토론문화 활성화에도 기여한다. 국회 안의 정쟁은 시끄럽기만 할 뿐 토론과는 거리가 멀다. 건강한 토론의 빈곤은 싱크탱크의 빈곤에도 원인이 있다. 졸부가 거부가 되는 건 재산의 규모뿐 아니라 생각의 크기와도 상관관계가 있다.

박승희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