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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한반도 문명 정착시킨 고려 리더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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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후고구려는 세력을 키워갔지만 내부 갈등과 지도력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견훤은 고려와의 싸움 속에서 내부적으로는 후계구도에 실패해 어렵게 세운 왕조를 스스로 무너트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권력이란 권력자의 의중에 따라 후계자가 정해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독단적으로 처리되면 중대한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궁예를 몰아낸 왕건은 918년 고려 건국 후 지방호족들을 아우르는 탁월한 친화력으로 우리 민족 스스로의 역량으로 후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는 지방호족의 여식들을 후비로 맞아들여 권력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신라와의 관계에서 무력으로 억압하는 방식을 취한 반면, 왕건은 신라왕실의 권위를 인정해주며 점차로 흡수 합병하는 정책을 전개했다.

 왕건은 신라와 후백제와의 대립이 첨예화된 시기에도 타국의 임금과 백성들을 배려할 줄 아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최고권력자는 경쟁상대를 무너뜨리는 치밀함과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지만, 인간적인 매력과 궁지에 몰린 적국의 백성들을 위로할 줄 아는 포용력을 지녀야 한다. 그는 즉위 후 민생안정을 정책의 최우선과제로 삼았고 지방호족들을 무력으로 다스리려 하지 않았다.

궁예를 추종하는 무리들의 반발이 거셌고 궁예의 추종세력들과 영향력 있는 지방호족들이 연대했다면 고려는 또다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왕건의 상황 판단과 대응태세는 적절했다. 그는 신왕조 고려의 대내외적인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북진과 숭불정책을 내세워 개성 천도를 단행했다.

신라와는 친화정책을 후백제와는 적대정책을 추구했으며, 후백제 후계구도상의 권력 암투가 극심해지면서 견훤이 고려로 망명하자 왕건은 때를 놓치지 않고 후백제를 단숨에 무너뜨리자 신라 왕은 자진 항복했다. 그는 북진정책에도 박차를 가해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토벌했으며 926년 발해 멸망 후에는 그 지도층과 백성들을 차별 없이 관직에 등용하는 통 큰 정치를 펼쳤다.

 또 고려를 대표하는 최고의 외교관으로 평가 받고 있는 서희의 리더십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993년 거란이 침입하자 적장인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압록강 하류 이남지역인 강동6주의 영토를 확보했다.

거란은 고려의 친송 정책과 북진정책을 내세워 고려를 침략했는데 서희는 소손녕에게 압록강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여진족 때문에 거란과의 관계회복을 도모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거란군의 철수를 이끌어냈다.

거란은 3년에 걸쳐 압록강 일대의 여진족을 토벌함에 따라 고려는 전쟁을 벌이지 않고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급부상하는 상황 속에서 배원정책을 추진해 몽골풍을 없애는데 주력했던 공민왕의 리더십도 인상적이다.

1356년에는 100년 넘게 지속된 쌍성총관부를 탈환해 영토를 확장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신흥국가인 명나라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은 고려의 국력신장에 큰 도움이 됐다.

이영관 순천향대 글로벌경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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