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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냄새다 … 10년 뒤에도 그 향기 살아 있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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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상엽(44) 벤틀리 외장·선행 디자인 총괄이 이 회사 주력 차종 중 하나인 컨티넨털 GT 옆에 서 있다. 그의 직함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벤틀리의 모든 외장 디자인, 선행 프로그램의 책임자이자 벤틀리의 생산과 디자인 전략 담당자.’ 별도의 영어식 이름을 쓰지 않고 ‘상엽 리(SangYup Lee)’라고 자기 이름을 표기하는 그는 “그만큼 내가 잘 해야 이 부르기 불편한 이름이 더 자주 불릴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벤틀리 모터스]

자동차 잡지를 보며 꿈을 키우던 학생은 미국으로 유학 갔고, 이윽고 ‘범블비 아빠’가 됐다. SF 블록버스터 ‘트랜스포머’의 그 범블비다. 그리고 지금은 영국 자동차 명가 벤틀리의 디자인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상엽(44) 벤틀리 외장·선행 총괄 디자이너는 여왕이 타는 이 럭셔리카 디자인의 실무 총책임자다.

 2019년 창사 100년을 맞는 벤틀리는 요즘 전에 없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2016년 첫 SUV를 출시한다. 이씨는 연초부터 이 같은 벤틀리의 도전에 합류했다. 최근 영국 런던서 그를 만나 명차의 디자인 철학을 들었다.

 그는 “디자인에서 최우선은 문화적 깊이, 문화에 대한 이해다. 2만개 파트가 모두 합쳐져야 완성되는 자동차 디자인에선 우연도, 한 순간에 이뤄지는 성공도 없다”며 입을 열었다.

 이씨는 서울 구로구 우신고 졸업 후 홍익대 조소과에 들어갔다. 당시 자동차 잡지 ‘오토비전’을 넘기며 캘리포니아의 자동차 디자인 명문인 아트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을 알게 됐다. 수소문해 그 학교를 찾아갔다. 대학 3학년, 군대를 다녀온 후의 일이다. 거기서 조각하듯 자동차를 디자인하는 학생들을 보며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재학 중 피닌파리나와 포르셰 인턴을 거쳤고, 우등 졸업했다. GM에서 11년간 콜벳(Corvette)·카마로(Camaro) 등의 디자이너로 일했다. 특히 카마로는 1960~70년대 포드 머스탱과 함께 미국 머슬카의 양대 산맥이었던 차종이다. 포드, 그리고 독일과 일본 스포츠카의 공세에 밀려 2001년 생산이 중단됐다.

 그는 카마로 전성기였던 69년형을 모델 삼아 새로운 카마로를 내놓았다. 부활은 영화 ‘트랜스포머’가 먼저 알렸다. 새 카마로는 베이비붐 세대에게는 풍요했던 시절을 추억하게 했고, 이후 신세대에게는 ‘범블비’로 히트하게 됐다. 뉴욕타임스는 2009년 그를 인터뷰하면서 이 새로운 카마로 디자이너가 자동차 문화가 다른 한국 출신에, 69년형 카마로가 출시됐을 때 태어난 신세대임을 강조했다.

 이씨는 2010년 캘리포니아의 폴크스바겐 그룹으로 이직했다. 폴크스바겐 그룹 산하엔 포르셰·아우디·람보르기니·벤틀리 등이 있다. 이씨는 올 초 벤틀리 디자인을 맡아 본사가 있는 영국 서부의 소도시 크루(Crewe)로 이사했다. 이곳 디자인연구소에서 16명의 디자이너를 포함한 50여 명의 팀원을 이끈다. 한국인 디자이너로는 김보라(30)씨가 있다.

이씨가 GM 시절 디자인한 카마로. 신세대에게는 영화 ‘트랜스포머’의 ‘범블비’로 더 유명하다.

 - 연간 900만대를 생산하는 GM에서 연간 9000대(2012년)를 만드는 벤틀리로 왔다.

 “굉장히 다르다. 자동차 디자인은 비즈니스 모델, 생산 라인에 대한 이해가 수반돼야 한다. 스타일을 중시하면서도 더 저렴하고 신속하게 생산할 수 있는 가치가 우선되는 곳과, 잘 만든 차 이상을 추구하는 곳의 차이일 거다. 때문에 브랜드 연구를 많이 한다. 영국서 태어나 10~20년씩 벤틀리에 매달려온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 디자인 리더십에 대한 고민이 많다.”

 - 좋은 디자인이란 게 있다면.

 “핵심은 정제미·비례미다. ‘나를 봐라’하며 튀는 게 아니라 로고가 없어도 나다운 것, 눈을 감고 냄새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벤틀리 디자인에서는 신선함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차가 5~10년 후에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한다. ‘올드카’가 아닌 ‘클래식카’, 이 시대의 아이콘이 되고자 한다.”

 - 자동차 디자인에서 냄새라니.

 “아름다운 외관뿐 아니라 내장도 중요하다. 벤틀리의 경우 가죽과 나무 냄새가 특징이다. 플라스틱이 아니라 나무와 가죽, 금속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버튼을 만졌을 때 느껴지는 깎은 금속의 온도, 장인들이 공들여 바느질한 흔적 등 눈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들, 그것이 곧 디자인의 깊이다.”

 어떻게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묻자 “나 역시 배가 고팠다. 똑똑한 것도 아니었고, 동양인 출신이 외국에서 도움이 되는 것도, 영어가 모국어인 것도 아니었다. 디자인을 하려면 공격적이어야 한다. 정확한 언어로 자기의 디자인 철학을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늘 부족함을 메우고자 노력했다”고 답했다.

 노력파인 그의 생활은 이렇다. 오전 6시쯤 일어나서, 빼놓지 않고 아침 식사를 하고, 7시 반쯤 출근해 조용한 사무실서 남들보다 일찍 일을 시작한다. “디자이너는 불편해야 하지 않나 싶다. 열등감을 극복하면서 모험하고, 성취해 나가야 한다. 영원한 1등은 없다”고 강조했다.

런던=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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