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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없는 삶이여, 이젠 안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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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신성식
선임기자

스트리트 텐트 레스토랑(Street Tent Restaurant).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루이뷔통의 여행서 『LV 시티가이드-서울』에 나오는 포장마차의 다른 이름이다. 작명에 위트와 재치가 돋보인다. 영하 10도 속에서 소득·학벌 무시하고 어울려 ‘우리’를 느끼며 즐기는 곳으로 표현했다. 대표저자 미셸 테만은 “책을 쓰면서 서울의 매력에 빠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웃고 넘기기에 부담스러운 평가도 있다. 미국의 CNN은 한국의 ‘넘버 1’ 10가지에 폭탄주 문화와 일중독을 꼽았다. 직장에서 폭탄주 회식을 하고 2차로 스트리트 텐트 레스토랑으로 가고…. 가족과 저녁은 언제 먹나 싶다. 얼마 전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가족과 주 4일 이상 저녁식사를 하는 비율은 66.5%다. 40대 남성은 57%로 더 낮다. 주말 이틀을 빼면 평일에 두 번 이상 가족과 식사하는 경우를 말한다. 6년 전 76%에서 10%포인트 떨어진 이유는 삶이 더 팍팍해진 탓일 게다. 평일에 가족과 보내는 여가시간도 106분밖에 안 된다(가족실태조사, 2010).

 선진국 주요 도시 어디를 가더라도 밤새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찾기 힘들다. 2008년 미국 워싱턴주에서 1년 연수생활을 할 때다. 한 달에 두세 차례 미국인 친구와 만날 때마다 그의 머리·손톱·옷 등에 페인트가 묻어 있었다. 퇴근 후 집을 손보거나 정원을 가꾸느라 묻었단다. 미국 건축 자재와 정원 가꾸기(가드닝) 장비·재료 아웃렛에 가면 그 규모에 입이 딱 벌어진다.

전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 다니엘 튜더는 본지 칼럼(9월 5일자 ‘아파트를 떠나면 얻는 것들’)에서 “한국의 아파트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일과 술로 저녁을 보내다 새벽 1~3시에 서울 심야버스를 가장 많이 타는 한국 직장인들이 단독주택을 손보고 정원을 가꿀 여유가 없다(서울시 조사 자료). 대용품으로 주말농장이 인기를 끈다.

 저녁이 없는 삶을 살다 보니 베이비부머(1955~63년생)의 은퇴 준비 네 가지 항목(사회적 관계·건강·마음·재무) 중 사회적 관계 점수가 가장 높게 나온다(서울대 한경혜 교수의 통합은퇴준비지수(MIRRI) 조사 결과). 전반적으로 노후준비가 부족하지만 그나마 사회적 관계는 나은 편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사회적 관계 평점은 좋은데 유대감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끝에서 셋째다. 최근 OECD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주변에 의지할 친척이 있나”라고 물었을 때 “그렇다”라고 답한 사람의 비율이 꼴찌에 가깝다. 그렇다면 미셸 테만이 칭찬해 마지않은 스트리트 텐트 레스토랑의 공동체 문화는 어디로 갔을까.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윤석명 연금연구센터장은 “일터와 그 주변에서 만드는 관계는 한계가 있다. 회사를 그만두면 네트워크도 무너진다”고 해석한다. 일과 회사 얘기만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4000달러를 넘었다고, 복지에 100조원을 쏟는다고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미국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이 주장한 ‘이스털린의 역설’(소득이 증가해도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행복경제학 이론)이 우리한테도 적용되는 듯하다. 저녁이 없는 삶은 20세기 개발경제 시대의 프레임이다. 가정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일을 우선하던 시대의 생활방식이다. 소득이 높은 나라도, 낮은 나라도 행복방정식의 정답은 다르지 않다. 바로 가족이다.

 소설가 최인호는 작고하기 전 법정 스님에게 “가정이야말로 신이 주신 축복의 성소(聖所)다. 가정이 바로 교회요 수도원이고 사찰”이라며 “가정은 온갖 상처와 불만을 치유해 주는 곳”이라고 말한다. 법정 스님은 “가족은 자식이건 남편이건 정말 몇 생의 인연으로 금생(今生)에 다시 만난 사이”라고 화답한다(『대화』, 샘터). 12월이다. 연말 송년회에 바쁘겠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고, 가족 저녁식사 비율을 80%로 끌어올려 보자. ‘저녁이 있는 삶’이 더 이상 정치구호로 나오지 않게.

신성식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