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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홍정상인, 내연녀 끼고 토목공사로 뒷돈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지젠예(季建業) 전 난징시장이 현장 지도를 하고 있는 모습. [이미지차이나]

“난징(南京)의 옛이름이 젠예(建?·건업)다. 나 지젠예(季建業)가 난징 인민을 이끌고 새로운 난징 건설이라는 대업(大業·다예)을 이루겠다.”

 2009년 8월 난징에 부임한 지젠예(56) 시장의 취임 일성이었다. 4년 남짓 시간이 흐른 지난 10월 15일 밤, 중국공산당의 감찰기구인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이하 기율위)의 부서기와 요원들을 태운 비행기가 난징공항에 착륙했다. 새벽 2시 기율위 정예요원들은 지젠예 시장을 호텔에서 연행해 베이징으로 압송했다. 시진핑(習近平) 체제 출범 이래 부패 혐의를 받은 장관급 인사의 10번째 낙마였다. 이날 오후 열린 난징시 생태문명건설동원대회에 지젠예 시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양웨이쩌(楊衛澤) 난징시 서기가 예정됐던 시장의 연설을 대신했다.

 “간부의 업적 욕심은 이해한다. 하지만 단기 효과만 좇는 보여주기식 토목공사[形象工程]엔 결코 반대한다”며 지젠예 시장이 벌여놓은 각종 전시성 공사를 비난했다. 17일 새벽 ‘남경신보(南京晨報)’ 1면엔 ‘난징의 계절이 바뀌었다(南京還季)’란 제목이 실렸다. 가을 하늘을 보도한 날씨 기사였지만 난징 시민들은 ‘지(季)시장이 바뀌었다(還)’란 뜻으로 읽었다. 이날 오전 중앙기율위 홈페이지에 ‘지젠예 조사 중’이라는 소식이 실리면서 중국 지방관료의 위험한 부패 사이클이 한 꺼풀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운하 개조·임대주택 프로젝트 추진
이권을 찾는 기업가는 관료를 노린다. 부패 관료는 사업권을 제공하고 뇌물과 실적을 챙긴다. 시작은 항상 작은 도시다. 승진과 함께 결탁의 규모도 커진다. 부패 사이클의 확대다. 청(淸)대에는 관리가 상인을 겸했다. 관모를 쓴 홍정상인(紅頂商人)이 전성기를 맞았다. 요즘은 고위관리와 관시(關系:친분 관계)를 맺고 정부와 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기업인을 일컫는 말이다. 지젠예는 현대판 홍정상인이었다.

 지젠예의 여인으로 알려진 메이톈(美田)부동산개발회사의 가오치(高琪) 회장은 1990년대 쿤산(昆山)에서 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했다. 당시 쿤산 시장이던 지젠예를 만났다. 2002년 가오치는 부동산 개발에 뛰어들었다. 쑤저우(蘇州)에서 메이톈을 설립했다. 지젠예는 양저우(揚州) 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메이톈은 회사 설립과 동시에 양저우 개발구 15만㎡에 아파트 20개 동을 짓는 양광신위안(陽光新苑) 건설 프로젝트를 따냈다. 여기서 3000만 위안(53억여원)을 남겼다. 공사는 부실투성이였다. 계속되는 누수를 못 견뎌 입주자들의 원성이 빗발쳤다. 그러자 개발구 주임이 공사대금 잔금 3000만 위안의 지급을 미뤘다. 돌연 해당 주임이 한직으로 밀려났다. 신임 주임이 잔금을 해결해줬다. 지젠예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이었다. 가오치는 지젠예의 부인과 성이 같았다. 지 시장의 처제를 사칭하며 쿤산→쑤저우→양저우→난징으로 이어진 지젠예의 승진 가도를 따라 각종 이권을 챙겼다. 가오치는 지젠예가 낙마하자 해외로 출국해 종적을 감춘 것으로 알려진다.

 지젠예가 8년간 근무한 양저우는 베이징과 항저우(杭州)를 잇는 대운하가 창장(長江)과 만나는 도시다. 두뇌 회전이 빠른 지젠예는 운하 개조를 구상했다. 서울의 청계천 복원과 비슷했다. 장쑤(江蘇)성의 대형 부동산개발업체인 우중(吳中)그룹이 사업권을 땄다. 우중그룹 주톈샤오(朱天曉) 회장은 지젠예와 관시가 있었다. 첫 만남은 우(吳)현에서 시작됐다. 지젠예는 1990년부터 96년까지 우현의 현(縣) 부서기였다. 주톈샤오는 우현 교육국장이었다. 2003년 우중그룹은 양저우 시정부와 공동출자 방식으로 카이윈(凱運)건설사를 만들었다. 양저우를 지나는 대운하 6.67㎞ 동단에 폭 30m 넓이의 녹지를 조성하고 아파트·상가를 건설하는 카이윈톈디(凱運天地) 프로젝트를 위해서였다. 운하가 살아나자 카이윈톈디는 금싸라기 땅이 됐다. 지젠예는 업적을, 주톈샤오는 이익을 각각 챙겼다.

 지젠예는 홍콩 기업인도 포섭했다. ‘남방주말’ 보도에 따르면 2005년 홍콩에서 양저우시 외자유치 설명회를 열었다. 홍콩 더하오(德豪)그룹의 오너인 저우다웨이(周達偉)·저우다즈(周達志) 형제와 만났다. 도시 녹화사업에 몰두하던 지젠예는 양저우의 명물인 서우시후(瘦西湖) 복원사업을 구상 중이었다. 서우시후는 2011년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뱃놀이를 즐겼던 곳이다. 더하오그룹은 서우시후 공원 서문 앞 요지의 서우시후 신톈디(新天地) 건설사업을 맡았다. 건설 과정에서 원가가 예상치를 넘어섰다. 더하오는 시 정부에 용적률 상향을 요청했고, 시는 이를 승인했다.

 2009년 난징시 대리시장에 부임한 지젠예는 중국 대륙에서 2000명 안팎인 장관급 반열에 올랐다. 난징시는 4개의 국가급 개발구, 8개 성급 개발구, 20여 개의 시급 개발단지로 이뤄진 16개 부성급(副省級) 도시 중 하나다. 지젠예는 서민형 임대주택인 보장방(保障房) 건설 프로젝트를 노렸다. 치린(麒麟)과학기술단지 6개 부지 36만5000㎡에 43억8000만 위안(약 7620억원)이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중 4개 부지를 메이톈의 자회사인 난징루이푸(南京瑞富)와 홍콩 더하오의 자회사 난징더하오(南京德豪)가 두 곳씩 나눠가졌다. 사업권 낙찰보다 시공이 빨랐다. 수의계약도 지젠예의 발목을 잡았다. 시정부 재정 긴축으로 공사비를 제때 지급받지 못한 저장(浙江) 출신 하도급 상인이 중앙에 지젠예의 비리를 고발했기 때문이다.

 중국 관료의 부패 스캔들에는 정부(情婦)가 빠지지 않는다. 지젠예도 예외가 아니다. 양저우 시장 시절 미모의 타자수이던 저우(周)모씨를 발전개혁위원회 부주임으로 발탁했다. 저우 부주임은 지젠예의 모든 국내외 출장을 함께했다.

 지젠예는 사무실보다 호텔을 좋아했다. 시 청사 대신 호텔 프레지덴셜룸을 애용했다. 난징 한푸(漢府)호텔이 집이자 사무실이었다. 양저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젠예가 묵던 호텔의 객실 매니저 주메이(祝梅)와 눈이 맞았다. 주메이는 곧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지젠예는 시정부 초대소에 근무하던 여종업원을 공원관리소에 취직시키기도 했다. 양저우시 환경보호국장 진(金)모씨를 포함한 지젠예의 여인들은 모두 중앙기율위에 불려갔다.

장쩌민 측근이라 시진핑 타깃 됐나
지방 관리가 업적과 실리를 모두 챙기는 데는 토목공사가 딱이다. 지젠예의 별명은 ‘치와와’다. ‘도시를 파헤치는 지(季) 시장’이란 뜻의 지와와(季??)가 애완용 강아지 치와와(吉娃娃)의 중국어 발음과 같다. 8년간 양저우에서 온갖 토목공사를 벌여 시내를 상전벽해로 만들었다며 시민들이 붙여줬다. ‘치와와’는 양저우에서는 칭찬이었지만 난징에서는 조롱이었다. 2009년 8월에 부임한 지젠예는 부임 5일째 도심을 가로지르는 중산둥루(中山東路)와 한중루(漢中路)의 경관개선사업을 10월 1일 건국 60주년 기념행사 전까지 한 달 만에 완공시키라고 지시했다. 지젠예 식(式) 돌격형 토목사업의 시작이다. 지젠예는 이어 183억 위안(약 3조1800억원)을 투입해 2014년까지 빗물과 오·폐수를 분리해 처리하는 하수처리장 공사에 착수했다. 시내 200㎢에 하수도관 500㎞를 까는 공사였다. 여기에다 전력망 개선사업, 도로정비 사업 등 온갖 명분의 공사로 인해 파헤쳐지지 않은 도로가 없을 정도로 난징 시내 전역이 공사판으로 변했다.

 시민과 시장 간의 불화는 오동나무 스캔들로 표면화됐다. 2011년 3월 지하철 공사를 이유로 난징의 상징인 수령 70~80년의 오동나무 600여 그루를 다른 곳에 옮겨 심으려던 계획이 시민들의 반대운동에 부닥쳤다. 이 계획은 결국 무산됐다.

 지젠예가 낙마한 직후 중국 언론에선 전·현직 총서기인 장쩌민(江澤民)과 시진핑(習近平) 사이의 갈등설이 불거졌다. ‘장쩌민의 집사’로 불리던 지젠예는 양저우가 고향인 장쩌민을 각별히 모셨다. 지젠예가 출세해 온 비결 중 하나다. 시진핑은 부패 척결을 위해 장쩌민 세력과 선을 긋고 있으며, 지젠예 낙마가 그 시작이라는 해석이 홍콩 매체를 통해 흘러나온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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