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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다면 행동하라 … 기쁘지 아니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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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박석무 이사장은 “다산은 제자에게 독서를 강조했다. ‘만약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데만 뜻을 두고서, 편안히 즐기다가 세상을 마치려 한다면, 죽어서 시체가 식기도 전에 벌써 이름이 없어질 것이다. 이는 새나 짐승의 일일 뿐이다. 그런데도 책을 읽지 않고 살기를 원하는가’라고 되물었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유네스코는 지난해 장 자크 루소(프랑스사상가), 클로드 드뷔시(프랑스 작곡가), 헤르만 헤세(독일 문학가)와 함께 다산(茶山)정약(1762~1836)을 기념 인물로 선정했다. 동양에선 다산이 유일했다. 그가 지은 수원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돼 있다. 이제 다산은 세계가 평가하는 인물이다.

18년 유배 생활에 530여 권의 저서로 답한 인물, 고통의 세월을 삶의 가치로 치환해버린 사람. 그가 정약용이다. 40년 넘게 정약용을 연구 중인 다산연구소 박석무(71) 이사장은 “다산을 알면 미치지 않을 수가 없다. 다산을 알고도 미치지 않는다면 그가 바로 미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를 통해 다산을 만났다.

 박석무 이사장은 유학자 집안에서 자랐다. 어릴 적 사랑방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며칠씩 묵고 가기도 했다.

 “나는 밥 심부름과 술 심부름을 했다. 사랑방에서 늘 들리던 이야기가 경(經)과 사(史)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중에 보니 경전은 철학이고, 역사는 삶이더라. 다산의 공부도 철학과 삶이었다.” 박 이사장은 서당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 덕분에 다산의 한문 원전을 읽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언제 다산에 빠졌나.

 “대학 다닐 때였다. 5·16 군사정권 치하였다. 다산의 ‘애절양(哀絶陽)’이란 시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왜 충격을 받았나.

 “한 농부가 있었다. 다산의 시대에는 사람 머리 수에 따라 세금을 내는 인두세였다. 갓 낳아 탯물도 마르지 않은 아이에게 세금을 내라고 했다. 농부가 낼 돈이 없자 관청에선 소를 끌고 가 버렸다. 소는 그의 전 재산이다. 결국 농부는 칼을 갈아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버렸다. 당시에는 피임법이 없었다. 우둔한 백성이 애를 안 낳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애절양’이다. 양을 자른 것을 슬퍼하노라.”

 박 이사장은 당시의 충격을 설명했다.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비판적 시인들이 등장했다. 엄혹했던 시절에 김지하와 고은, 양성우 등이 시를 썼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 다산처럼 뼈 아프고 적나라하진 못했다”고 했다. 박 이사장도 민주화 운동을 하며 네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정치를 못해도 어떻게 이렇게 못할 수가 있느냐. 이런 메시지가 담긴 거다. 왕조국가에서 어떻게 그런 시를 지을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걸 가능하게 했나.

 “성리학자들은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마음 속에 있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다산은 달랐다. 현실 생활에서 행동으로 나타난 결과가 인의예지라고 봤다. 다산은 실현가능성이 없으면 학문이 아니라고 했다. 유배지에서 아들과 며느리에게 쓴 편지에도 그런 대목이 있다.”

 -어떤 대목인가.

 “‘너희 어머니와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에게 효도를 해라. 너희가 효를 실천하면 나는 여기서 죽어도 좋고, 유배가 풀리지 않아도 좋다. 실천되는 것만 보면 나는 행복하고 기쁘다.’ 다산은 사서육경(四書六經)이 마음 속의 이치라는 논리를 없앴다. 대신 현실에서 행동할 수 있는 걸로 바꿔버렸다. 그게 다산학이다. 그래서 다산학이 실학(實學)이다.”

 주자학은 당시 조선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였다. 12세기 남송(南宋)에서 생겨났지만, 600년 세월이 흐른 18세기에도 조선은 털끝 하나 고칠 수 없다며 주자학을 신봉했다. “조선의 학문에 ‘학(學)’자를 하나 붙인다면 ‘퇴계학’도 아니고, ‘율곡학’도 아니다. ‘다산학’이다. 퇴계와 율곡은 주자의 학문을 변주했다. 다산은 주자의 성리학 체계를 엎어버렸다. 이(理)라는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공자와 맹자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다산이 황해도 곡산 부사로 있을 때였다. 고을에 산적떼가 출몰했다. 박 이사장은 “다산의 산적 문제 해결책을 보면 그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해결했나.

 “무작정 산적을 소탕하지 않았다. 먼저 민첩한 아전 몇을 산적 소굴로 보냈다. 이들이 왜 산적이 됐고,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해 오도록 했다. 결국 산적과 관아의 아전이 연결됐기 때문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산적은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였다. 조폭이 강력계 형사들과 공생하는 셈이었다. 다산은 산적을 치지 않았다.”

 -그럼 누구를 쳤나.

 “산적과 연결된 아전들을 모두 쳐버렸다. 그러자 산적 문제는 저절로 없어졌다. 나중에 산적 몇을 잡았지만 문책하지 않았다. 가서 농사를 지으라며 돌려보냈다. 만약 다산이 산적 소굴만 공격했더라면 근본적인 문제를 풀지 못했을 거다. 다산은 늘 원리를 먼저 파악하고, 그걸 현실에 접목했다.”

 다산은 유학자였다. 동시에 탁월한 행정가, 교육학자, 역사학자, 토목공학자, 기계공학자, 수학자, 지리학자, 의사, 법학자, 시인이자 화가였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통섭과 융합의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했다. 축성(築城) 경험이 없던 다산은 정조가 “10년 안에 지으라”던 수원 화성을 34개월 만에 완공했다. 치밀한 설계 계획과 거중기 등 첨단 건축장비를 고안한 덕분이었다. 뿐만 아니다. 천연두가 창궐하자 종두법도 내놓았다. 임금이 위독할 때 의사로서 두 번이나 궁중으로 불려갔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전문가 수준으로 넘나든다. 통섭형 인간이다. 다산의 공부법, 그 비밀이 뭔가.

 “『논어』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란 말이 나온다. 학(學)은 배우는 거고, 습(習)은 익히는 거다. 그런데 다산은 ‘학은 배움이고, 습은 행함이다’고 풀이했다. 학문은 현실 속에서 실천할 때 비로소 터득된다는 뜻이다. 이게 다산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이었다.”

 다산은 자신의 배움을 끊임없이 현실에 대입했다. 박 이사장은 “다산은 ‘배운 걸 실천할 때 인간의 마음이 기뻐진다’고 했다. 당시에는 ‘행복’이란 용어가 없었다. 다산은 ‘기쁠 열(悅)’자로 표현했다. 이게 바로 다산의 행복론이다”고 설명했다.

 28세 때 문과에 급제한 다산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궁궐에 소장된 귀한 서적을 다산에게만 모두 빌려주도록 특별 지시할 정도였다. 다산은 암행어사, 곡산부사,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거쳤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천주교인을 박해한 신유교옥에 연루돼 40세 때 유배를 당했다.

 다산의 삶은 고통의 범벅이었다. 셋째 형 약종과 매형 이승훈은 형장에서 죽었다.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에서 16년간 유배 생활을 하다 죽었다. 다산은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하도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발목의 살이 벌어졌다. 세 번이나 복숭아 뼈가 보였다고 한다. 결국 53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다산은 지독한 삶의 고통을 지독한 기쁨으로 치환했다.

 박 이사장은 국회의원을 두 차례 역임했다. 그의 정계 은퇴 이유에도 다산이 있었다. 2002년 열린우리당의 전남 무안 지역 출마자로 그가 내정됐다. 당선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때 박 이사장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짧은 성명서도 냈다. 제목이 ‘다시 다산으로 돌아가며’였다. “돌이켜봐도 그건 아주 잘한 결정이었다. 국회의원 배지를 포기할 만큼, 다산 연구는 매력적이고 보람찬 일이다.”

 그는 현재 성균관대 석좌교수다. 2004년부터 꼬박 10년째 ‘다산과 리더십’강의를 하고 있다. 학생들 사이에선 ‘명품 강의’로 통한다. 학점과 상관없이 다시 듣는 학생도 있다. “다산은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을 잘 썼다. 그건 높은 산에 올라가 함성을 지르는 게 아니다. 다산은 자신이 아는 걸 행동으로 옮기는 게 ‘호연지기’라고 했다. 그럴 때 우리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게 다산이 말한 행복이다.”

박석무 이사장의 추천서

박석무 이사장은 “다산은 학문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과학의 기본이 뭔가. 수학, 물리, 화학, 생물이다. 이런 학문이 건축학이나 기계공학의 바탕이 된다. 다산은 그걸 꿰뚫어 봤다. 그래서 ‘산학서(算學署)’라는 수학 연구 기관을 정부기구로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온갖 공업 기술의 정교함이 수리에 근본을 두고 있음을 안 거다. 아인슈타인도 처음에는 수학자였다”고 말했다.

다산시선(정약용 지음, 송재소 역주, 창비)=2500수가 넘는 다산의 시에서 현실성과 역사성이 뚜렷한 400여 수를 골라 번역하고 주를 낸 다산의 시선집이다. 다산시를 전공한 송재소 교수는 30년 전에 초판을 출간했는데 이번에 50여 수를 추가하고 글도 새로 다듬고 개정판을 냈다. 다산의 철학과 사상이 시로 응축돼 있어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19세기 견문지식의 축적과 지식의 탄생(홍한주 지음, 김윤조·진재교 옮김, 소명출판사)= 상·하 두 권으로 번역한 이 책은 조선후기 학자의 견문과 지식이 얼마나 넓고 컸던가를 알게 해준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도 놀랍지만, 역주자들의 꼼꼼한 번역과 착실한 주석이 마음에 든다. 조선이란 전통사회와 동아시아 학술 문화의 이해를 원하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정선 목민심서(정약용 지음, 다산연구회 역주, 창비)=다산의 『목민심서』는 공직자들의 바이블로 불린다. 48권을 6책으로 완역했던 창비에서, 6책의 핵심적인 내용만 고르고 압축하여 정선(精選)해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목민심서』의 중요한 내용과 의미가 살아 있다. 읽기 간편하고 내용도 충실하다.

◆ 박석무=1942년 전남 무안 출생. 전남대 법대와 동대학원 졸업. 민주화 운동으로 네 차례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 있을 때도 다산을 파고 들었다. 13·14대 국회의원,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 단국대 이사장, 한국고전번역원 원장등을 지냈다. 현재 다산연구소 이사장이다. 저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풀어 쓰는 다산 이야기 1·2』 『다산 정약용의 일일수행 1·2』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편역서 『다산 산문선』 등.

글=백성호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⑫ 정약용의 실학 …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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