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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성급 김장' 기본은 부들부들·아삭하게 절인 배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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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철이 왔다. 올해는 배추·무를 비롯해 마늘·고추 등 김장 채소 값이 다 내려 김장 비용 부담이 한결 가벼워졌다. 김치 담그는 법은 지역마다, 집안마다 각양각색이다. 그래서 ‘남의 집’ 맛있는 김치를 대하면 그 비법이 궁금해진다. 우리나라 특급 호텔 최초로 자체 브랜드 김치를 만든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의 김치 비법을 알아봤다.

SK 그룹 계열인 워커힐 호텔은 1989년 고 최종현 그룹 회장의 지시에 따라 ‘김치연구소’를 만들어 김치를 담그고 있다. 서울·경기 지역의 양반가 전통 김치 맛을 규명, 재현하는 게 목표다. 워커힐 호텔 김치연구소에선 김장은 하지 않는다. 대신 1년 내내 김치를 담근다. 하루 배추 절이고, 그 다음날 소 집어넣고, 또 다음날 배추 절여 그 다음날 소 집어넣으며 1년을 보낸다. ‘연구소’에서 만드는 김치인 만큼 과정 하나하나에 원칙과 기준이 있다. 배추 절이는 물의 염도는 3.2%, 익은 김치의 pH는 4.3이란 식이다. 워커힐 김치 가격은 1㎏ 2만4000원(배추김치 기준)이다. 다른 시판 김치 가격의 네다섯 배에 이른다. 그런데도 이틀에 한 번 배추 500∼1000㎏씩 담그는 김치가 다 팔리고 있다. 100만원이 넘는 연회비를 내고 한 달에 두 번씩 워커힐 김치를 배달받아 먹는 회원도 150여 명이다. 그 비결을 알아보기 위해 이틀 동안 김치연구소에 들어가 작업 과정을 꼼꼼히 살펴봤다. 위생복과 신발커버·마스크·머리망 등 위생장비를 갖춰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소금은 줄기에만 … 절임물 염도 3.2% 적당

워커힐 김치연구소를 책임지고 있는 이선희(44) 조리장은 “김치 담그는 전 과정 중에서 절임 과정이 가장 까다롭다”면서 “제일 숙련된 조리사가 배추에 소금 뿌리는 작업을 한다”고 설명했다. 절임은 주부들도 어렵게 생각하는 과정이다. 기혼여성 인터넷 커뮤니티 ‘아줌마 닷컴’에서 10월 24일∼11월 6일 주부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김장할 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배추 절이기’를 꼽은 응답자가 38%로 가장 많았다. 그 뒤로 ‘재료 손질하기’(18%), ‘양념 만들기’(16%) 등이 이어졌다.

절임 작업은 첫 날 오후 2시 시작됐다. 먼저 배추를 반으로 잘라 뿌리쪽 밑둥 부분에 3㎝ 깊이의 칼집을 두 군데 냈다. 배추 줄기 두꺼운 부분까지 잘 절여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배추를 자르기 전에 우거지를 골라내는 일도 중요하다. 푸른 색이 과하거나 찢어진 배추잎을 골라내 우거지로 사용한다. 배추 전체 무게의 6% 정도가 우거지로 분리됐다. 우거지는 절일 때와 김치 숙성시킬 때 배추가 공기와 접촉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워커힐 김치연구소에선 배추를 소금물에 담가 절이지 않고 소금을 뿌려 절인다. 소금물에 담그면 배추의 줄기와 잎에 닿는 소금물 농도가 같아 줄기는 덜 절여지고 잎은 많이 절여질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절임 과정에서 사용하는 소금 양은 배추 무게의 4.5∼10% 정도다. 배추의 상태를 보고 소금 양을 결정하는데, 물 많은 여름배추에는 소금을 덜 넣고 단단한 겨울배추를 절일 때는 소금 양을 10%까지 늘린다. 소금은 3년 동안 간수 뺀 천일염(‘백형조 천일염’)을 사용한다. 전남 영광에서 구입했다.

잘라 놓은 배추는 먼저 물을 흠뻑 뿌려 ‘샤워’를 시킨다. 그리고 줄기 부분에만 소금을 뿌린다. 잎은 줄기 부분에서 녹아나온 소금만으로도 충분히 잘 절여진다. 소금을 뿌린 배추는 절단면을 위로 해서 절임통에 차곡차곡 집어넣는다. 배추가 한 층씩 쌓일 때마다 절임통 안에 물을 부어주는데, 그 양도 잘 맞춰야 한다. 워커힐 연구소에선 배추 35개마다 물 20L씩 부었다. 그래야 최종 절임물 염도가 기준치 ‘3.2%’에 맞는다. 물을 부을 때 통 가장자리를 따라 살살 흘려넣어야 한다. 배추 위로 물을 부어버리면 소금이 씻겨나간다. 제 양의 물을 다 집어넣어도 절임 초기 단계에선 배추가 물에 잠기지 않는다. 배추를 절임통 안에 다 집어넣었다면 그 위에 우거지를 쌓고 소금을 약간 뿌린 뒤 배추 숨이 죽도록 기다린다. 4∼5시간 지나 배추가 소금물 속에 찰랑찰랑 잠기면 위에 무겁고 평평한 물건을 올려 눌러준다.

배추 500㎏ 절임 작업은 오후 3시 끝이 났다. 이때부터 18시간이 지나야 절임 과정이 마무리된다. 절임 온도는 0∼10도로 맞춰주는 게 이상적이다. 상온(18∼20도)에서 절일 때는 8시간만 절이면 되는데, 저온에서 절인 김치가 맛이 더 좋다.

소에 민물새우 넣으면 담백한 맛 더해

다음날 오전 9시. 절인 배추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에서 김치연구소의 업무는 시작됐다. 이 조리장은 “줄기가 부들부들해져 쉽게 젖혀지면서도 부러뜨렸을 땐 아삭한 소리가 나야 잘 절여진 상태”라고 설명했다. 또 “배추의 노란 색깔은 살아 있어야 하고, 배추가 눌려 조직이 투명해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절인 배추를 깨끗이 씻는 과정도 중요하다. 배추를 하나씩 물이 가득 담긴 통에 넣고 세게 흔들어 씻는다. 그리고 저절로 물이 빠지도록 구멍 있는 용기에 담아 둔다. 물을 뺀다며 배추를 비틀어 짜면 조직이 손상돼 질겨진다.

워커힐 김치 연구소에선 물이 빠지도록 4시간을 기다리면서 그동안 김치 소를 준비했다. 소 재료 하나하나마다 이야기가 많았다. 이 조리장이 전국을 돌며 산지를 확인하고, 제조 과정을 따져본 뒤 골라온 재료들이다.

고춧가루는 경북 의성에서 가져왔다. 이 조리장은 “‘청아띠’ 제품이다. 냉장시설이 잘 돼 있어 골랐다. 그곳에선 말린 고추를 한꺼번에 가루로 내지 않고 고추 상태로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20㎏씩 빻아 보내준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충북 음성의 고춧가루를 사용했다. 산지가 바뀌어도 고춧가루 입자 크기는 늘 같다. 흔히 김치용으로 쓰는 14메시(mesh) 고춧가루보다 훨씬 입자가 고운 24메시짜리를 사용한다. 식사 후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소에 민물새우를 넣는 것이 독특했다. 담백한 맛을 더할 뿐 아니라 김치에 부족한 칼슘·단백질을 보충해주는 식재료다. 민물새우는 주로 호남지역에서 11월에 잠깐 나왔다 들어간다. 워커힐에선 제철에 1년치를 한꺼번에 구입해 냉동시켰다가 그때그때 꺼내 다져 쓰고 있다.

젓갈은 새우젓만 넣는다. 충남 광천 토굴에서 숙성시킨 육젓이다. 실온에서 숙성시킨 새우젓과 달리 국물이 뽀얗고, 새우의 눈·꼬리·수염까지 다 남아 있다. 가격은 비싼 편이다. 워커힐에서 구입하는 가격이 1㎏ 3만원이라고 했다.

소에 집어넣는 소금은 ‘세척 천일염’을 사용한다. 절임용 소금과 같은 종류지만, 세척 과정을 거쳐 불순물이 제거됐다는 게 다르다.

쇠고기 육수로 김칫국물 넉넉하게

마늘·생강은 모두 밭에서 수확한 상태 그대로 구입해 사용한다. 시판하는 깐 마늘, 다진 생강 등은 모두 물에 불린 뒤 손질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물에 불렸던 마늘·생강을 사용해 김치를 담그면 군내가 나기 쉽다.

김칫국물 양을 늘리기 위해 소 재료에 찹쌀풀죽과 쇠고기육수를 포함시켰다. 김칫국물 양이 많아야 숙성 과정에서 공기가 차단돼 혐기성 균인 젖산균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된다. 찹쌀풀죽은 찹쌀가루를 10배의 물에서 은근히 끓여 만들고, 육수는 핏물 뺀 양지머리에 6배의 물을 넣은 뒤 끓여 만든다. 고기 육수 맛은 국 국물용으로 쓸 때보다 약간 싱겁다.

배는 소에 넣는 설탕 양을 줄이고 김치의 시원한 맛을 더하기 위한 목적으로 넣는다. 무와 똑같은 모양으로 채썰어 사용한다. 단맛이 강한 신고배가 가장 좋다.

갓·미나리·쪽파도 소 재료다. 대파는 진이 생겨 국물이 끈적거릴 수 있어 쪽파를 사용한다. 갓은 길이가 너무 길거나 옆으로 많이 퍼진 것은 맛이 떨어지므로 잘 골라야 한다. 미나리는 줄기가 잘 부러지는 게 좋고, 쪽파는 흰 줄기 부분이 긴 것이 적당하다.

김장철에는 굴도 넣는데, 취재를 하러 간 날에는 굴 상태가 좋지 않아 뺐다.

소 재료를 섞는 데도 순서가 있다. 먼저 무에 고춧가루를 넣어 색이 곱게 물들도록 한다. 여기에 소금·새우젓·마늘·생강·설탕을 넣어 간이 배게 버무린다. 물기가 생길 즈음에 찹쌀풀죽과 미나리·갓을 넣어 버무리고, 이어 생새우와 배채를 넣는다. 이렇게 버무린 뒤 곧바로 간을 봐선 안 된다. 소금·설탕이 녹을 시간이 필요하다. 대략 1시간쯤 지난 뒤 맛을 보고 육수를 넣어 간을 맞춘 뒤 쪽파와 굴을 넣어 살짝만 버무린다. 쪽파와 굴을 처음부터 넣으면 쉽게 물러져 좋지 않다. 이날 만든 소의 양은 100㎏ 정도로, 배추 무게의 20%에 달했다.

김치 소는 절인 배추의 줄기 부분에만 집어넣었다. 잎 부위에는 양념만 살짝 발라준다. 소를 넣은 배추는 절단면이 위로 가도록 김칫독에 넣었다. 전통 옹기 항아리(‘신일토기’)다. 이 조리장은 “항아리와 스테인리스 스틸 통, 플라스틱 통, 밀폐용기 등 여러 용기를 사용해 실험해본 결과 항아리에서 숙성시킨 김치가 가장 시원하고 아삭했다”고 말했다. 발효되면서 나오는 가스가 항아리의 기공을 통해 빠져나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배추를 다 넣은 뒤에는 우거지로 덮어준다. 우거지는 먹지 않을 요량이지만, 양념을 제대로 한 뒤 넣어야 한다. 소가 아깝다면 소금만 넣어서라도 간을 맞춰야 한다. 절여놓기만 한 우거지를 덮어놓으면 김치에서 군내가 난다.

배추를 항아리에 가득 채우면 안 되는 것도 명심할 일이다. 발효 과정에서 부피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항아리는 곧바로 0∼5도 냉장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20일 후면 가장 맛있는 상태의 김치가 된단다. pH 4.3, 염도 2%, 젖산균 수 1㎖당 2억 개 이상인 상태다.

김치 담그는 일은 둘째 날 오후 4시30분쯤 끝났다. 이제 온도 점검하며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95년부터 19년째 워커힐 김치연구소에서 김치를 담그고 있는 이 조리장은 “매일 담그는 김치인데도 항아리 뚜껑을 열 때마다 늘 긴장된다”고 말했다.

글=이지영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워커힐 호텔이 공개한 ‘양반집 전통 김치’ 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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