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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가을 끝자락 … 벌써 오신 겨울나그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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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를 좇아 간다고 하자 지인이 말했습니다. “탐조는 사람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요. 그러면서 자기가 아는 사람은 “3일 동안 세수도, 면도도 하지 않고 인간 냄새를 쏙 뺀 다음에 철새를 찍으러 간다”고요. 당최 뭔 말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 뜻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충남 서산 천수만에는 이미 겨울 진객 흑두루미, 노랑부리저어새 등이 찾아왔더군요. 경기도 안산 시화호에 머물고 있던 황새 한마리도 지난 12일 날아왔습니다. 겨울 나그네를 찍으려고 서산간척지를 헤맸습니다. 서울 여의도의 18배나 되는, 154㎢의 넓은 곳에서 10여만 마리나 되는 기러기와 오리 무리 속에 숨어 있는 흑두루미를 찾기는 ‘한강 백사장에서 바늘 찾는 격’이더군요.

그래도 찾아야 합니다. 흑두루미는 전 세계에서 1만 마리밖에 없다는 멸종 위기종이지요. 겨울마다 천수만에 300여 마리, 전남 순천만에 600여 마리가 찾아듭니다. 한 시간여를 찾아 헤맨 끝에 족히 500m는 떨어진 논두렁에 일렬로 서서 낙곡을 쪼아 먹는 흑두루미 20여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대포처럼 생긴 600mm 망원렌즈를 단 카메라를 든 사진기자 선배 뒤를 따라 오리걸음으로 살금살금 다가갔습니다.

200m쯤 다가가자 흑두루미는 어떻게 알았는지 훨훨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때 기분이 어떤지 아시죠. ‘완전히~새됐죠’. 그제야 서산시 문화관광해설사가 한마디 툭 던집니다. “새들은 인간보다 시력이 8배가량 좋고, 후각과 청각도 훨씬 뛰어납니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건만 미세한 걸음 소리에도 놀란 것이지요.

그제야 ‘자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알겠더군요. 인간의 때가 덕지덕지 붙어 있던 탓에 제대로 된 사진 한 컷 건지지 못하고 두세 시간 흑두루미와 숨바꼭질을 해야만 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고, 세상 모두가 등을 돌리는 요즘, 고맙게도 저 멀리서 어김없이 철새들이 날아왔습니다. 저 추운 북쪽에서 오직 제 몸뚱어리를 나침반 삼아 꼬박 3일 밤낮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날갯짓을 해 천수만에 내려앉았습니다. 해준 것 없지만 고맙게도 잊지 않고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고맙고 귀한 건 힘찬 날갯짓 때문입니다. 그 날갯짓은 ‘삶의 날갯짓’이고 ‘희망의 날갯짓’입니다. 인간뿐 아니라 미물조차 몸뚱이를 한껏 움츠리는 이 계절에 그들의 날갯짓을 보면 힘들고 지친 삶 잠시나마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중얼거립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 찾아와도 우리도 한번 힘껏 날아, 날아 보자꾸나~’.

아 참 이런 말이 있죠? ‘우둔하고 잘 잊어 먹는 사람’을 향해서 놀림조로 ‘야! 이 새대가리야’라고요. 하지만 철새를 좇다 보니 이 말이 틀린 걸 알았습니다. 알래스카에 사는 큰뒷부리도요새는 오직 제 몸에 남아 있는 기억만으로 1만1700㎞ 떨어진 뉴질랜드까지 8일간 쉬지 않고 날아간다고 합니다. 그사이 몸뚱어리는 홀쭉해지고요. 위대하고 놀랍지 않습니까. 이제는 이렇게 놀려야, 아니 일갈해야겠습니다. “야! 이 새보다 못한 인간아.”

새 구경 황금시간은 새들의 '출퇴근' 무렵

탐조여행 1번지 서산 천수만의 하루

충남 서산시 천수만은 여의도 면적의 18배나 되는 ‘철새들의 천국’이다. 154㎢에 이르는 천수만에는 커다란 간월호와 넓은 농지가 있어 철새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겨울 보금자리다. 현재 천연기념물인 흑두루미(228호) 250여 마리와 노랑부리저어새(205호) 50여 마리 등 20만여 마리가 겨울을 보낼 채비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탐조여행 1번지’ 천수만에서의 하루를 소개한다.

해 뜰 녘 세상 깨우는 기러기들의 아우성

지난 6일 새벽 6시. 저 멀리 서산 방조제 가로등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을 뿐 천수만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하지만 시끌벅적 새들의 아우성으로 간월호도, 서산간척지도 들썩인다. 마치 5~6월, 암놈을 유혹하려는 개구리 수놈 울음처럼 시끄럽다.

“사실은 기러기들이 잠에서 깨우는 게 아닙니다. 기러기류들은 잠잘 때도 ‘끼룩~’ ‘끼룩~’ 소리내어 웁니다. 마치 잠꼬대나 코를 고는 사람들처럼요.” 서산시청 환경생태과 박민철 주무관이 웃으면서 말했다.

바로 옆의 흑두루미나 노랑부리저어새 무리들에게는 기러기들의 울음소리는 마치 자장가인가 보다. 옴짝달싹하지 않고 외발로 모래톱에 서서 잘도 잔다.

조금씩 사위가 밝아오자 부지런한 기러기 몇 마리가 무리들을 뒤로 하고 날아올랐다. 목적지는 서산간척지 논이다. 하지만 먹을 것(벼 낟알)이 많지 않다. 예전에는 철새들을 위해 볏짚을 논에다 그냥 두었지만 지금은 곤포사일리지(비닐로 감아 발효시키고 있는 볏짚 뭉치)를 만들어버려 먹을 것이 확 줄었다. 그 탓에 한 해 수십만 마리가 날아와 군무를 펼치던 가창오리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거의 실종 상태다. “한 해 낟알 구입비로 6억원가량 사용하지만 철새들에게는 그야말로 ‘새 발의 피’죠. 역부족이네요.” 박민철씨의 안타까운 하소연이 들려왔다.

해가 뜰 무렵인 오전 7시쯤 되자 10만여 마리의 기러기들이 일제히 아침을 먹으러 날아올랐다. 한꺼번에 수백 마리, 수천 마리씩 모래톱을 박차고 오르는 모습은 아침에만 볼 수 있는 또 다른 장관이다.

우아하게 잠들어 있던 흑두루미와 노랑부리저어새도 이때쯤 서서히 기지개를 켠다. 그래도 흑두루미는 기러기처럼 촐랑대지 않는다. 큼지막한 날개를 천천히 휘저으며 서서히 이륙한 후 ‘뚜루루~’ ‘뚜루루~’ 소리를 내며 논으로 향했다.

오감으로 체험하는 철새 교육의 장 버드랜드

천수만 인근인 서산시 부석면에 있는 버드랜드는 보고, 만지고, 느끼면서 철새를 알아가는 곳이다. 아이들이나 가족 관람객들이 좋아하는 것은 4D영화관이다. ‘막둥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러기가 시베리아 등지에서 천수만으로 날아와 겨울을 나며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4D 영화로 보여준다. 최신 기술 덕분에 막둥이로 변신해 하늘을 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본관 전시실 2층은 철새 박물관이다. 검은목두루미, 흑두루미, 독수리 등 천수만을 찾아오는 여름·겨울 철새 130여 종의 박제가 박물관을 지키고 있다. 손을 넣어 다양한 새의 부리 등을 만져볼 수 있는 장치도 있다.

본관을 나와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국내에 몇 곳 없는 야생동물치료센터가 있다. 덫에 걸려 오른 앞발이 절단된 삵, 납으로 만든 낚시추를 삼켜 납중독에 걸린 큰 고니 등 사람들로 인해 다친 동물들이 우리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런데 처량한 모습의 독수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친구들은 하늘을 날며 제왕 노릇을 하고 있지만 이 독수리는 안타깝게도 영원히 날 수 없다. 전선에 걸려 오른 날개가 절단됐기 때문이란다. 전남 순천시가 순천만의 전봇대를 모두 뽑은 것도 흑두루미 등 큰 새들이 전깃줄에 의해 다치는 경우가 많아서다.

탐조버스는 주말에는 하루 여섯 차례 운행한다. 25인승 버스를 타고 1시간 반에서 두 시간 동안 천수만 곳곳을 누비며 철새들을 찾아간다. 해설사가 동행하기에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어 좋다. 사실 철새에 조애가 깊지 않으면 멀리서 보면 모두가 기러기나 오리 같다. 하지만 쌍안경을 통해 새들을 보면서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 어떤 것이 큰기러기인지, 쇠기러기인지 구분할 수 있다. 탐조객들의 눈에 띄지도 않는 다양한 철새를 잘도 찾아주기에 편리하게 철새를 구경하기에 좋다.

노을과 어우러진 흑두루미의 우아한 날갯짓

천수만 철새 중 가장 많은 종은 가창오리가 아닌 기러기다. 10만여 마리가 논이나 호수에서 놀고 있다. 흑두루미나 노랑부리저어새·황새 등은 개체수가 적어 찾기가 쉽지 않다. 낮에는 탐조객들과 숨바꼭질을 한다. 몇백 m 바깥에서도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어 가까이 가기만 하면 잽싸게 날아가 버린다. 그야말로 새 된 기분, 허탈하다.

멸종위기 철새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잠자리 부근이다. 신기하게도 철새들은 잠은 한 곳에서만 잔다. 천수만의 경우 제3탐조대 부근 모래톱이다. 흑두루미 등은 해 질 무렵에 보금자리로 돌아온다. 이때가 흑두루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에 가장 좋다. ‘서산에 걸친 주황색 태양을 배경으로 날갯짓하는 흑두루미’. 맑은 날이면 천수만에서는 이런 멋진 장면을 매일 볼 수 있다. 낮 동안 2시간여를 간척지 논에서 헤맸지만 몇 마리 보지 못했던 흑두루미가 시곗바늘이 오후 5시를 넘어서자 서너 마리씩 무리를 지어 잠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간월호 건너 저 멀리 부석면 산자락으로 노을이 짙게 드리우자 30여 마리의 흑두루미가 한꺼번에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천천히 모래톱에 내려앉았다. ‘파닥파닥’ 날갯짓하는 기러기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느릿느릿하면서도 때로는 활짝 펼친 채 활강하는 모습은 사진 속 바로 그 장면이었다. 몸통은 검지만 목은 하얀, 그 모습 그대로다. ‘아름다운 비행’은 기러기가 아니라 흑두루미의 것이었다. 모래톱에 내려앉은 흑두루미는 250여 마리. 사위가 어둠 속으로 파묻히자 이들도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글=이석희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충남 서산 천수만 탐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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