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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거창 사건>(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조사단 피습>(4)
합동 조사단원들은 국방부 측과 경찰이외는 모두 전투경험이 없기 때문에 위장공비의 습격을 받았을 때 몹시 당황한 게 사실이었다. 거창 읍에서부터 잔뜩 공포분위기를 조성한데 다가 실제로 총탄이 날아오자 처음에는 모드가 정말 공비습격인줄 알고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졌다. 얼마 후에야 일부의원이 위장공비습격임을 어렴풋이 감지했지만 아무도 현장조사의 강행을 내세우지는 못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국회조사단 역시 단합이 결여됐고 무기력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계엄 하에 불가피했겠지만 합동조사단은 김종원 대령의 엄포와 위세에 눌려 시종 그의 페이스대로 움직인 감이 없지 않았다.
다시 관계자들의 이야기
▲명조관씨(당시고검검사·거창 사전 조사<아군사상 20여명이라 능청>단 법무부대표·현 변호사·57) <우리조사단이 탄 50여대의 차량이 죽 열을 지어 가는데 거창읍에서 10리쯤 가니까 목교의 교각을 톱으로 쓸어놓고 저것도 어젯밤 공비의 소행이라고 합디다. 車는 물이 말라서 내를 그냥 건너갔어요. 하여간 시종일관 조사단원들에게 공포감을 주려고 하더군요. 30리쯤 전진하니까 가파른 커브 길의 고개가 나오데요.
오른쪽은 수목이 무성한 큰산이고 왼쪽은 몇 척이나 되는 절벽이예요. 군들이 고갯길을 서행하는데 앞에서 별안간 따발총과 소련 아식보 총 소리가 납디다. 그러자 김 대령이 차를 세우고 앞을 둘러보더니 공비출현이라고 고함을 치더군요. 나는 차에서 뛰어내려 호위 순경과 함께 군 총을 빼들고 벌벌 떨면서 앞을 두리번거렸어요. 기왕 죽을 바엔 적을 한 놈이라도 소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떠오릅디다. 머리 위를 총알이 팽팽 날아오는데 호위 순경과 함께 뛰기 시작했어요.
5백m쯤 뛰어가니까 절벽아래 얕은 구덩이가 있어 엉겁결에 그 속으로 내려 뛰었어요. 다시 뛰며 지서가 있습디다. 그리고 뛰며 들어가 숨을 돌리고 다시 일어나려는데 오른쪽 발목이 통통 부어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어요. 아까 구덩이로 내려 뛸 때 발목을 삐었는데 그때는 몰랐어요.
지서서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차에 편승했어요. 보니까 앞에 가던 호위소대에서 여러명 부상했다고 군「앰뷸런스」를 동원해 싣고 나오기도 합디다.
거창에 돌아오니까 김종원 대령은 사망자가 3명 부상자가 20여명이나 났다고 태연하게 능청을 떨더군요. 진주에 돌아오자 11사단장 최덕신 준장이 나와 조사단을 정중히 맞고 저녁을 대접했어요. 이 회식석상에서도 김 대령의 태도는 아주 오만불손했어요. 나는 보다못해 국회의원들 앞에서 그게 무슨 짓이냐고 대들었더니 김 대령은 눈을 부라리며 부산 가서 보자고 합디다. 다른 분들은 워낙 습격사건에 훈들이 나서기가 죽어있더군요. 대부분의 조사단원들이기 모두 틀림없는 조작극이라는 추측은 했지만 누구하나 내색을 못했어요.
조사단 피습정보가 거창서에 들어오자 대기했던 사찰유격대는 재빨리 현장으로 출동했다. 그러나 경찰대는 조사단을 습격했다는 공비와 조우 할 수 없었다, 이래서 다음 증언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조사단 피습은 분명히 조작극임이 드러났다.
▲허용변씨(당시 거창 경찰서 경비주임=경위·현 부산서 사업·50)<51년 4월7일에 나는 서장 명령으로「사찰 유격대」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는데 조사단이 떠난 지 얼마 안 있다가 남하 지서로부터 공비가 나왔다는 보고가 들어옵니다.
그러더니 조사단이 피습됐다고 해요. 나는 즉시「사찰 유격대」를 지휘코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가보니까 조사단은 모두 무사해서 현장서 탄피 등을 회수, 계속 공비 출현 지짐을 향해 추적했어요. 그런데 조사단들이 거창읍으로 되돌아가자 총성은 멎고 공비를 행방이 묘연해 졌어요. 아무리 찾아보아도 감쪽같이 없어졌어요. 나도 내심으로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요.

<필사의 피신, 기절한 사람도>
▲김종순씨(당시국회의원·거창 사건 합동조사단장·현 광주서 변호 사업가) <신완면으로 들어가려면 작은 계곡이 있는데 여기에 길이5, 6m의 다리가 있어요. 그 다리의 교각하나가 톱으로 잘려있어 기분이 좋지 않더군요. 나는 산봉우에 대고 권총을 쏘아봤자 별수 없으니, 그만 두라고 했어요. 어쨌든 우리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길옆고랑으로 기어들어 엎드렸어요. 이때 김 대령은 지프에 달고 온 사이렌을 냅다 틀었는데 그것이 신호인지 이쪽 편 군인들이 응사합디다. 한10분 지났을까 총성이 멎어 정신을 차려보니 감양의 박정규 의원은 나뭇단을 붙잡고 엎디어 있습디다.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자세를 낮추고 더러는 기어서 경을 친 현장에서 2백m 떨어진 마을 주막에 모였어요.
거기서 보니까 볏짚단위에 부산지검의 강 차장 검사가 누워 있어요. 총을 맞은 줄 알았는데 원래 고혈압이어서 충격으로 기절한 거예요. 누구 할 것 없이 사색이었지요.
국방부 측은 이제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지만 의원들 중 누구도 가느니 안 가는니 의사 표시하는 분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오후 3지쯤에 거창으로 되돌아 왔어요.
조사단피습을 경찰에서 보고했는지 그때 휴회중인 국회에서 신익희 의장 명으로 된 전보가 날아왔어요. 오늘 상황 들었으나 기어이 조사를 단행하라는 내용이었어요. 그러나 조사단들은 그대로 가자는 말도 그만두자는 말도 없었어요.
그래서 단장인 내가 여기서 현지 행을 중단하자고 단을 내리고 거창읍에서 조사할 수 있는 것만 해 가지고 가서 본회의에 보고하자고 했습니다. 서장실에서 몇 관계 증인들을 불러 조사하고 부산으로 돌아갔지요.
다음은 조사단에 동행한 종군기자의 증언. 그는 경찰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거 같다고 말하고 있다.
▲이회호씨(당시부산의 국제신보기자·현 조선일보 월간조선부장·43) <진주서 거창 사이에는 공비습격을 받고 불탄「버스」가 처박혀 있어서 처음부터 퍽 불안했어요. 사건현장으로 갈 때 우리기자 4명은 트럭을 타고 김 대령의 지프 뒤를 쫓아갔지요. 우리 뒤에는 경찰1개대도 따릅디다.
총성이 나자 나는 처음에 구덩이에 엎디었다가 살금살금 앞으로 기어나가 봤어요.
김 대령이 큰 바위에 서서 열심히 지휘하다가 나를 보고 손을 마구 저으며 내려가라고 야단을 합디다. 뒤로 나와 길가에 올라가 보니, 경찰병력은 그냥 앉아 있어요. 내가 고함을 치니까 무안했던지 총을 쏘는 체 하데요. 일부 조사단원들은 엎디어 벌벌 떨고 있고요. 거창에 돌아오니까 김 대령은 기자들은 즉시 부산으로 돌아가라고 법석입디다, 우리기자들도 경찰행동을 보고 그들도 방해공작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았어요.>

<신 국방실각하자 다시 거론>
합동조사단의 현지 행이 실패한 후 4월 한달 동안 국회에서는 거창 사건에 대해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다. 거창 사건 역시 국민방위군사건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돌파구가 생김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했다. 이 돌파구는 4월24일 이대통령의 결단으로 국방·내무·법무의 세 장관이 해임됨으로써 마련되었다.
그러나 조 내무는 당일에 김 법무는 25일에 각각 사표를 제출했지만 신 국방이 해임되고 이기린씨가 그후임에 임명된 것은 5월7일이었다. 이렇게 신 국방의 거취는 근2주일 동안이나 유동적이어서 몇 국회의원들이 이대통령을 찾아가 그의 의중을 더듬어 보기도 했다. 여하간 신 국방의 실각으로 활기를 되찾은 국회는 거창 사건 처리에 다시 손을 댔다.
이 국방이 등장한 바로 다음날인 5월8일에 국회는 서이환 의원의 발의로 거창 사건처리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하기로 의결하고 결의문작성책임자로 노기용(민국) 김종순(공화구) 지봉해(신정) 서이환(민우) 의원을 지명했다. 이들 4의원이 작성한 다음과 같은 결의문이 5월14일에야 본회의에서 채택되어 정부로 이송되었다.

<국회의 사건처리결의문>
어휘가 상당히 우회적이고 사건진상과도 좀 거리가 있는 그런 내용의 결의문이었다.
『거창 사건에 관한 정부와 국회의 조사가 그 전말이 대동소이하나 착리점을 검토한즉 ①1백87인의 처형은 고등 군법회의에서 행한 것이라 하나 법무관의 출정 출정이 없는 재판이었으며 피고인의 명단도 전혀 없으며 이는 법치국가에 실재 할 수 없는 비합법적인 행형이라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②사형집행을 개별적으로 행하지 앉았으니 이는 현지의 실정이 수시 수처에 출몰하는 공비의 토벌이 계속 중이었으며 그 불의의 역습을 전율하는 나머지에 행하여진 비상조치의 행형이라고 상상할 수는 있으나 그 행형의 방법이 심히 부당하다는 비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전술한 사건은 포학무도하고 출몰 비상한 공비를 토벌하는 전투지구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부득이한 전투사정이 개재하였으리라는 것은 시인하는 바이나 헌정의 궤도인 민주정치의 달성보장을 기하기 위해서는 지휘감독의 칙잭이 있는 사단장이상의 각 책임자와 현지의 행형 책임자를 준엄 처단 또는 징계함으로써 형정의 과오를 시정 천명해야한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언하는 바이다.
◇주요일보(1951년5월2·3·4일)
※5월2일 ▲중공군, 서울동북방으로 이동 ▲「밴플리트」사령관, 적 공세 실패라고 언명▲일황, 「리지웨이」 장군방문 ▲「이란」석유국유화
※5월3일 ▲아군, 전전선서 반격개시 ▲미군, 의정부돌입 ▲「맥」원사, 상원에서 한국전증언
※5월4일 ▲「리지웨이」 사령관, 전선시찰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 조치령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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