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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아 발레리나와 73세 ‘왕언니’가 꾸미는 기적의 무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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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호 12면

10일 데뷔하는 나선영 일반인 발레단 멤버들이 아티튀드(attitude)동작을 선보이고 있다. 왼쪽부터 나선영 대표, 한혜원(21·대학생), 강은비(23·대학생), 이나윤(27·회사원), 채주용(31·회사원), 최나현(24·대학생), 강민지(29·회사원)씨. 조용철 기자

핑크 빛 발레슈즈를 신은 발이 살짝 떨린다. 로맨틱 튀튀(무릎을 덮는 긴 발레복) 위로 교차한 손은 조금 어색하다. 어김없이 지도자의 지적이 날아온다. “발은 5번 자세로 턴아웃하고 손가락은 쫙 펴야지. 다시 처음부터!” 10일 데뷔 공연을 준비하는 발레리나 신은진(가명·13)양의 8일 연습 장면이다. 여느 무용수처럼 연습에 여념이 없는 은진양은 자폐 1급 장애를 갖고 있다. 10일 서울 노원구 어울림극장에서 ‘호두까기인형’ 음악에 맞춰 솔로 무대를 꾸민다. 5년간 서울 동교동 나선영 발레스튜디오에서 ‘발레 치료’를 받아 온 결실이다.

오늘 첫 공연하는 ‘나선영 일반인 발레단’

‘왕언니 발레리나’ 이문자(73ㆍ왼쪽)씨와 신은진(13)양.

은진양의 어머니 남경희(가명·52)씨는 “1초도 가만히 있지 못하던 아이가 공연까지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은진양의 솔로 공연시간은 1분30초. 턴 8회, 샹주망(changement:점프 후 두 발의 위치를 바꿔 착지), 에샤페(échappé:두 발을 교차하며 점프) 등으로 빼곡한 작품이다. 은진양과 어머니, 지도자인 나선영 발레스튜디오 대표에겐 기적의 1분30초다. 은진양의 작품명은 ‘나도 할 수 있어요’. 나 대표가 결성한 나선영 일반인 발레단의 10일 데뷔 공연 중 3막 독무대다. 은진양은 어엿한 나선영 발레단의 프린시펄 댄서(principal dancer·수석무용수)가 된 셈이다.

순수 일반인으로 발레단을 꾸려 공연을 올리는 것도 과감한 실험으로 평가된다. 조미송 한국발레연구학회 이사장은 “러시아 같은 발레 선진국에서 일반인 공연이 종종 있지만 국내 공연에선 전공자들을 받쳐 주는 군무에 참가하는 게 전부”라며 “일반인이 주역부터 군무까지 도맡은 발레 공연은 최초일 것”이라고 의미를 찾았다.
 
운동으로서의 발레, 남녀노소에게 매력
은진양과 함께 또 한 명의 특별한 프린시펄도 있다. 73세의 ‘왕언니’인 이문자씨다. 2003년 우연히 며느리와 함께 시작해 무릎 관절 통증도 많이 치료했고 체중 10㎏ 감량에도 성공했다. 지난해 9월엔 일반인 대상의 무용대회에 나가 160여 명 가운데 대상을 받은 어엿한 발레리나다. 지금은 또래에게 ‘젊은 노년’을 위한 발레를 가르치고 싶은 꿈을 꾸고 있다. ‘향수’라는 제목으로 1분40초간 꾸미는 그의 무대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유연한 아라베스크(arabesque:한 다리로 서서 다른 다리를 뒤로 일직선으로 들어 올려 최대한 긴 선을 만드는 동작)를 선보인다. 나이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일명 캘아츠)의 스티븐 라바인(당시 61세) 총장도 기자가 2009년 만나 인터뷰를 하던 중에 취미 얘기가 나오자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너무 아름다워 신난다”고 말했다.

발레단의 일반인 단원들은 대부분 이문자씨처럼 체중 감량, 자세 교정, 허리 통증 치료에 성공했다. 어떤 이는 체중이 갑자기 불어 고민하다 헬스클럽은 지루해, 요가는 유연성이 모자라 각각 포기했다. 단원들은 일단 발레가 즐겁다고들 한다. 차이콥스키 음악에 맞춰 할 수 있는 운동이 얼마나 될까. 여기에 강하고 두꺼운 근육이 아닌 잔근육을 발달시켜 몸매를 다져 준다는 점도 큰 매력이다. 시작 당시 다리를 찢는 최대 각도가 30도에 불과했던 어느 단원은 이제 다리를 완전히 수직으로 펼 수 있다. 대학생 강은비(23)씨는 “발레 시작 전엔 바지 허리 사이즈가 33인치였는데 발레를 한 지 2년 반 만에 25로 줄었다”고 했다. 은비씨는 이번 공연에서 또래 대학생인 한혜원(21)씨와 함께 ‘백조의 호수’ 음악에서 가져온 모티브로 2인무를 춘다. 혜원씨는 “유산소와 무산소를 합친 운동인 데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해 주는 운동인 것 같아 즐겁다”고 했다. 채주용(31·회사원)씨의 경우 일반인 발레 콩쿠르에 나가 입상까지 했다. 야근 후 오후 11시에도 운동을 하고 돌아가는 그는 “몸이 제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 든다.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하니 예술과 운동의 중간에 있는 게 운동으로서 발레의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40대의 단원 이지연씨는 요즘 어머니에게 발레를 권유해 함께 학원에 다니고 있다.

발레 전공을 생각하는 이들도 생겼다. 최나현(24)씨는 경제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지만 조심스럽게 프로 발레리나의 꿈을 꾸고 있다. 나현씨는 “목 디스크로 오랫동안 고생해 해 보지 않은 운동이 없다”며 “마지막으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발레를 했는데, 체력도 좋아졌고 목 통증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몸이 아파 휴학 후 집에서 쉬기만 했던 나현씨는 이젠 발레 스튜디오에 상주하며 연습에 몰입한다.

여자만 한다는 건 오해다. 한상욱(29·회사원)씨는 6개월차 ‘발레리노’다. 체중도 5㎏ 줄였고 유연성도 좋아졌다고 한다. 그는 “처음엔 친구들에게 창피해 말도 못했는데 지금은 친구들도 적잖은 관심을 보인다”고 말했다.
 
테크닉 대신 아름다운 동작에 비중
발레는 인간이 인간만의 힘으로 중력을 거슬러 날아오르는 예술이다. 테크닉도 화려하다. 하지만 10일 공연엔 32번 연속 회전을 선보이는 푸에테(fouette) 같은 화려한 테크닉은 없다. 흔히 ‘토슈즈’라고 알려진 포인트 슈즈(pointe shoes)도 신지 않는다. 공중으로 날아올라 두 다리를 일(一) 자로 벌리는 그랑 주테(grand jeté) 등의 고난도 기술은 어렸을 때부터 이 학원에서 발레를 배워 전공을 꿈꾸는 이샘(16)·정동현(15) 학생만 구사한다. 몸에 무리를 줄 수 있는 테크닉은 욕심부리지 않는다는 게 나 대표의 믿음이기 때문.

기본 몸풀기 동작인 바(barre)를 제대로 해서 몸의 근육을 구석구석 풀어주고 뼈를 제대로 자리 잡게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철칙이다. 그래서 요즘 우후죽순 생기는 다른 발레학원에서 많이 여는 토슈즈 클래스도 웬만해선 열지 않는다. 기초가 탄탄한 그의 클래스는 은진양과 같은 장애아 치료에도 효과를 냈다. 나대표는 10여 년간 무료로 정신지체아·자폐아를 치료한 ‘천사 클래스’의 성과를 논문으로 써서 지난해 세종대에서 박사 학위도 받았다. 은진양의 담임 선생님은 나 대표에게 “발레 덕분에 은진이의 사회성이 발전했다”며 감사 인사를 했다. 올해 초 은진양은 국가공인 정보기술자격 A등급 자격증도 취득했다.

이번 공연은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인형’ 중 ‘꽃의 왈츠’ 등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지만 일반인 수준에 맞게 안무를 창작했다. 테크닉 없이 아름다운 발레 동작을 만들어 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 대표는 “일반인이 테크닉을 구사하려다간 몸에 무리를 줘 역효과를 낼 수 있다. 기초를 탄탄히 다지되 즐겁고 꾸준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며 “두 달간 준비하며 우리가 공연을 만들어 낸다는 과정 자체가 감동적”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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