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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제자는 필자>|<제17화>양화초기(8)|이종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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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파리」유학시절>
내가 동경에서 귀국한 것은 1923년 4월. 중앙 고보 도화 선생으로 있는 동안 술만 마시다가 25년에「프랑스」로 떠났다.
그때 술친구는 안재홍씨의 동생이요 나보다 3년 연상인 안재학씨. 그는 연희전문에 나가고 있었는데, 둘은 모두 애주가였고 주로 가는 곳이 명월 관 아니면 식도 원이었다. 당시 안씨의 월급이 2백원, 내가 1백원인데 다 합해도 비싼 술값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약 2년이 지났을 때 명월 관에 내 외상이 근 8백원, 안씨도 식도 원에 상당한 외상이 남아있었다. 이 외상을 갚기는 갚아야겠는데 도무지 방도가 없었다.
그러던 중 떠오른 묘 계가『구라파로 유학 가자!』둘 이는 똑같이 무릎을 쳤다. 여비를 타서 외상 갚자는 심산이었다. 일본「고오베」에서 「마르세이유」까지 뱃삯이 6백원 할 때였다. 내심이야 어쨌든 부모님은 자식의 웅 지를 기꺼이 응해주었다. 나는 여비로 1천 원, 3개월간의 생활비로 2천 원- 도합 3천 원을 받아 들고는 우선 명월 관으로 달려갔다. 외상값을 청산하니 송별연을 푸짐하게 베풀어주었다. 그러나 수중에 남은 돈에 가슴을 졸였다. 하는 수 없이 배에 오른 뒤 저간의 사정얘기를 대강 써서 가친에게 고하였더니, 우리가「마르세이유」항에 도착했을 때는 다시 보낸 1천 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씨는 본시 이공계니까 독일로 가「베를린」대학에서 양조를 공부했다. 역시 나는 미술이니까「파리」에 주저앉았다. 처음에는「게르망」인가하는 분한테서「데상」을 지도 받았다. 그는 완전히 자유로운 제작태도를 권장했고 동양화의 남화 식으로 그리는걸 좋아했다. 그래서 다시 옮긴 것이 백 계「러시아」인「슈하이예프」의 연구소. 그는 속눈썹까지 꼼꼼히 그리는 성미여서 우리가 그려놓으면 큰 붓으로 북북 지워버리곤 했다. 완전한 독재의 지도방법이었다. 자기의 딸이 연구소를 같이 다녔는데 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기에서 비로소「데상」에 자신을 얻었다.
27년 가을 나는「살롱·드·돈」에 2점의 작품을 내어 모두 입선됐다. 당시 미술의 고장 「파리」에는 중요한 두 미술전이 있었다. 봄에 여는「살롱·프랑탕」은 우리의 국전과 같은 것이고, 「살롱·드·돈」은 가을철을 택해 재야 전으로 열렸는데, 당시 전위적인 야수파가 여길 토대로 성장했다.「마티스」나 일인「후지다·쓰무시」가 있을 때이다.
「살롱·드·돈」에 출품한『모 부인의 초상』(연세대 소장)은「파리」시절 친구의 부인을「모델」로 한 그림이다. 백 계「러시아」인인 그 친구는 같은 연구소에 있었고 집에도 여러 번 가 보았는데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나를 찾아와 자기 부인을「모델」로 하겠다는 화가가 있는데 『혼자 그리는「아틀리에」에는 안가겠다』고 하니 함께 제작해 주기를 간청하는 것이었다. 나와 함께 그린「네덜란드」화가는 이듬해 봄 그 작품으로「살롱·프랑탕」에 입선했다.
내가 출품한 다른 하나의 작품은『정물』. 화실에서 꽃을 놓고 그린 10호 짜리 인데 동란 중에 끌고 다니느라고 참 사연이 길다. 이즈음 일본에서는 대작 즉 30∼60호가 보통인데 프랑스의 전람회는 도리어 소품이 적지 않았다.
「파리」에는 그때 한국사람이 모두 27명에 불과했다. 그 몇 명 안 되는 유학생 가운데 집에서 학비가 오는 축은 농림부장관을 지낸 공진항씨, 해방직후 방송국장을 지낸 이정섭 양씨와 나 정도. 「파리」로 오는 통로는 상해에서 선편을 이용하는 길과 대륙을 질러 독일로 해서 온 두 총이 있었는데 모두 어려운 처지로 와있었다. 김법린·정석해·이 모씨 등은 취직이 어려워「사나토륨」에서 일하며「파리」대학을 다녔다.
독일에서도 비슷하지만 월50원 정도면 공부할 수 있었다. 불화로 환산하면 돈 값이 떨어져 6백「프랑」. 방 값은 1백50「프랑」이면 되고 밥값이 2백「프랑」, 나머지로 겨우 학자금이 됐다. 그런데 나는 3개월에 1천 원의 송금을 받았으므로 그리 군색할 것이 없었다. 내가 새낸 방은「아틀리에」가 40실이 나 있는 빌딩의 한 방으로, 5백「프랑」에 월세 들어 있었다. 비싼 술은 마시지 못할지라도「녹담빌」이라는 철야술집에서「코냑」을 마실 처지는 됐다.「베를린」의 안재학씨는 가끔 와서 회포를 풀고 갔다.
최 린 씨가 들렀을 때도 환영회를 내「아틀리에」에서 열었지만, 평소에도 우리 집은 종종 식당 역할을 했다. 일요일이면 약속이나 한 듯이 모여들어 갈비 국을 끓여먹곤 했다.
28년 3월 만 3년만에 귀국하여 그해가을 동아일보사 3층 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50점 모두 재 불 당시 제작된 것으로「살롱·드·돈」에 입선된 것을 필두로 습작 같은 것도 한목 출품해 귀국보고를 겸하였다. 그 중엔 여러 점의「누드」에 대해서는 검열 순사가 여러 차례 풍속운운하며 시비했으나 신문사에서 얘기해 줘서 괜찮았다. 그「누드」l점은 일인이 3백원에 가져갔고『모 부인의 초상』은 김 연수 사장이 5백원에, 유옥겸 연 전 교감이 25호 짜 리를 2백원에 가져가는 등 호평을 받았다고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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