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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국감 '을들의 반란' … 문외한 의원들이 자초한 부메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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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소아
정치국제부문 기자

#1. 새누리당 김한표 의원은 지난 24일 국정감사 때 장석효 한국가스공사 사장에게 자신의 질의서가 사전에 공사 측에 유출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김 의원=“여기 (공사 측 답변) 자료를 보면 제 질의서가 (사전에) 다 나갔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입수했어요?”

 ▶장 사장=“아마…휴지통이나 이런 데서 줍지 않았을까요?”

 피감기관 관계자들은 웃고, 김 의원은 당황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김 의원=“…휴지통요?”

 #2. 국정감사가 진행 중인 국회 본청 근처엔 피감기관 실무진이 삼삼오오 담배를 피우고 캔 음료수를 마시며 대화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국정감사 2주째,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주변에서 대기하던 피감기관 직원들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

 ▶A씨=“내가 진짜 불쌍해 (국회의원이 요청한 자료를) 준다.”

 ▶B씨=“걔 아직도 국회의원 해? 우리 사업구조 하나도 모르면서 매년 골치 아프게 한다니까.”

 ▶C씨=“그냥 버텨. 어차피 카메라 비출 때 한 번 소리 지르고 국감 지나면 자료 달라고 했던 것도 까먹어.”

 1987년 이래 25년째 실시되는 국정감사. 고질병은 국회의원들의 고압적인 자세뿐만이 아니다. 피감기관의 불성실한 태도는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다.

 올해는 유난히 피감기관들의 불성실이 두드러져 보인다. 특히 감사를 받는 상당수 정부부처는 국회에 허위 자료를 제출하거나 아예 ‘못 주겠다’며 버티고 있다.

 새누리당 김상민 의원은 국감에 대비해 432개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소속 직원의 가족, 친·인척 등에게 채용 시 특혜를 주는 이른바 ‘고용세습’ 조항이 있는지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도착한 자료는 ‘해당 없음’이 대부분이었다. 의구심이 생긴 김 의원 측은 ‘알리오(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를 통해 사실확인에 나섰다. 결국 교육부, 미래창조과학부, 국토교통부, 보건복지부 산하 36개 공공기관이 허위로 자료를 제출한 사실을 확인했다. 김 의원은 “정부기관이 이렇게 거짓 정보를 제출한다면 백날 국감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민주당 김기식 의원은 29일 산업은행 국감 때 “산업은행의 부실채권이 4조5000억원이나 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홍기택 산업은행장은 “부실채권은 2조2000억원”이라고 바로잡았다. 김 의원의 질의가 잘못된 게 아니라 산업은행 측이 애초 김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가 틀린 것이었다. 김 의원은 “어제까지 누차 확인했는데 4조5000억원이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통계가 2조원씩이나 잘못됐다고 하니 말이 되느냐”고 항의했다.

 한 새누리당 의원 보좌관은 “피감기관이 자료 제출을 계속 미루길래 참다 못해 담당 과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우리가 무슨 (자료 내놓는) 자판기냐’고 하더라. 옆에선 ‘또 뭐라고 지X이야?’라고 하는 소리도 들렸다”고 했다.

고용노동위 소속 한 민주당 의원 보좌관은 민감한 자료를 누차 요청하자 피감기관 관계자가 “자꾸 이러면 당신이 고가의 외제차를 몬다는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전했다.

 피감기관장들의 “취임한 지 얼마 안 돼 잘 모른다. 그건 제가 아니라 ○○○ 국장이 한 것”이라는 식의 떠넘기기 발언이나 형식적인 답변은 일상적인 풍경이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28일 국감 내내 “검토해보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자신이 시작한 안보교육을 민주당 의원들이 비판하면서 취소를 요구할 때도 “그것 한번 검토해보겠다”는 식이었다.

 피감기관을 불성실하게 만드는 건 엉뚱한 답변이 나오거나 자신의 질의를 반박해도 “됐고요, 다음 질문 하겠습니다”는 식으로 넘어가버리고 마는 의원들 자신이다.

 국회는 올해 역대 최다인 628곳을 피감기관으로 선정했다. 하지만 의원들의 전문성은 제자리다. 2005년부터 의원실에서 일해온 한 보좌관은 “정부 공무원들은 10년 전부터 ‘수감기관 국감 매뉴얼’을 갖춰놓고 속이든 피해가든 철저하게 대응하는데, 국회의 국감 준비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말했다.

명지대 김형준(정치학) 교수는 “지금처럼 의원들이 상임위를 수시로 바꾸는 상황에서 효율적인 감사를 하라는 건 남자보고 아이를 낳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전공과 관계없이 경력관리용으로 상임위를 배치하는 관행을 바꾸고, 한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의원들을 적극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소아 정치국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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