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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삼성의 갈망 '삼성 생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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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사진 삼성전자]

28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웨스틴 호텔의 그랜드볼룸. 커티스 사사키(57) 미국 삼성전자 미디어솔루션센터(MSC) 전무가 갤럭시노트 10.1 두 대에 각각 아이스하키 게임 애플리케이션(앱)을 실행시켰다. 두 기기를 가까이 붙이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밀어내자 자동으로 양쪽 게임이 연동됐다. 왼쪽 노트에서 서브한 하키볼이 오른쪽 노트 골대에 꽂히는 장면에 행사장에 모인 개발자 800여 명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이날 삼성전자가 새로 발표한 ‘삼성 그룹플레이 소프트웨어개발도구(SDK)’를 활용한 게임의 모습이다.

 삼성전자가 애플·구글에 맞서는 정보기술(IT)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포문을 열었다. 삼성전자는 27일부터 사흘간 ‘개발자들의 성지’라 불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발자 행사를 열었다. 처음으로 참가비를 받는 유료 행사로 마련했다. 총 7개 부문 50개 세션으로 열린 이번 행사에는 전 세계 33개국의 개발자, 파트너사 관계자 1300여 명이 참석했다. 그룹플레이 외에도 같은 장소에 있는 기기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삼성 커넥티비티 SDK’와 업그레이드된 ‘삼성 모바일 SDK’가 새롭게 공개됐다.

 90분간 이어진 기조연설에선 갤럭시노트, 갤럭시기어, 55인치 곡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 스마트TV 등 삼성전자의 프리미엄 제품들이 줄줄이 무대에 올랐다. 스마트폰으로 파일을 선택하면 TV에서 영상과 음악이 나오는 식의 ‘멀티스크린’ SDK 시연을 위해서다. 스마트폰·TV·PC 등 다양한 하드웨어(HW) 중심으로 회사를 운영해온 강점을 살려 이 제품들을 서로 융합·복합하는 소프트웨어(SW)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삼성전자의 속내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삼성전자 이종석 부사장은 “당신이 개발한 앱이 스마트폰뿐 아니라 태블릿 PC, TV, 기업용 솔루션 등에도 활용될 수 있다”며 “이번 행사는 삼성전자를 통해 당신의 앱을 전 세계로 널리 퍼뜨릴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삼성이 ‘애플-구글-MS’의 3강 구도를 깨고 4대 SW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이번 행사의 참가비는 299달러로 1000달러 안팎인 다른 개발자 회의에 비하면 아직 세가 약하다. 입장을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다른 회의와는 달리 이날 삼성전자 행사장은 행사 2시간 전까지 비교적 한산한 모습이었다. 개발자들의 반응도 엇갈렸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온 카를로 레드맨은 “당장 새 SDK를 이용한 앱을 만들 수 있도록 예산 책정을 해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 개발자인 키스 헤이건은 “안드로이드 플랫폼 외에 삼성만을 위한 앱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뭔지 잘 와닿지 않는다”고 평했다.

 삼성전자가 개발자 대회를 연 것은 SW가 IT 산업의 핵심 경쟁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은 그동안 HW 제조에 있어선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삼성전자의 스마트폰은 3분기에만 9000만 대 가까이 팔려나갔다. 스마트폰 시장을 열어젖힌 애플과의 격차를 갈수록 벌리고 있다. 그러나 SW에 있어선 구글의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등 자체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2011년 구글이 모토로라를 인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IT 파워가 삼성 같은 하드웨어 업체에서 소프트웨어 강자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한계를 절감해서다. 삼성은 그해 ‘소프트 드리븐 컴퍼니(Soft Driven Company)’로의 변신을 선언했다. 하반기 공채부터 SW직군인 S직군을 신설하고 대규모 채용을 시작해 2011년 2만5000명 수준이던 SW 인력을 최근엔 3만6000명 수준으로 늘렸다.

 하지만 현재 삼성을 포함한 국내 SW 파워는 아직 미완성이다. 인력 부족 문제부터 심각하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따르면 SW 개발 전문가의 미충원율은 28.9%에 달한다. 대학 문을 나서는 SW 인력의 수가 기업들이 필요한 수치의 70% 정도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1990년대 100명이 넘었던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정원은 올해 50여 명으로 줄었다. SW가 3D 업종 취급을 받으면서 우수 인력은 물론이고 관련 분야를 전공하겠다는 이들은 갈수록 줄어든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의 인력 충원은 “중소기업 인력을 다 빼간다”는 비난을 받기까지 했다. 그래서 올 5월엔 앞으로 5년간 1675억원을 투입해 SW 인력 5만 명을 양성한다고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이 자체 SW 역량을 강화하며 ‘탈(脫) 구글’을 시도하고는 있지만 구글과의 관계를 당장 끊기는 어렵다. 느슨한 관계는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구글의 에릭 슈밋(58) 회장은 30일 삼성전자 서초사옥을 방문해 신종균 사장과 만날 예정이다. 삼성은 안드로이드 OS를 활용한 모바일 기기 분야의 우등생이다. 이날 만남에서는 단순한 협력 유지를 넘어서 새 소프트웨어 전략에 관한 논의가 오갈 것으로 예상된다.

 SW 산업 육성의 중요성은 삼성과 같은 개별 기업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전 세계 시장에서 SW가 차지하는 규모는 1조3158억 달러로, 휴대전화(2446억 달러)나 반도체(3161억 달러)는 물론이고 자동차(8030억 달러)도 넘어섰다.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대응해야 할 과제라는 의미다. 정부 역시 창조경제를 강조하면서 SW 산업 육성에 적극 나섰다.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은 최근 SW 인력 22만 대군 양성 계획을 내놓았다. 장기간 투자와 지원이 필요한 SW 인력 양성을 개별 기업에만 맡기기 어려운 만큼 정부 주도로 우수 인력을 배출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이 발표된 지 불과 며칠도 지나지 않아 현장에서는 “정부가 시장을 오판하고 있다”는 쓴소리가 쏟아졌다. 28일 국내 주요 IT 개발자 커뮤니티인 ‘OKJSP’는 최 장관에게 공개 질의서를 보내 “정부 지원이 없어서 고급 인력이 없는 게 아니라 기술력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지금도 수많은 정부 지원 IT 취업과정을 통해 과포화 상태에 이를 지경으로 많은 신규 개발자들이 양산되고 있다”며 “정말로 부족한 것은 절대적인 개발자의 수가 아니라 국제 수준에서 경쟁력을 갖춘 핵심 개발 인력”이라고 꼬집었다. 한 업계 전문가는 “SW를 HW의 부속품쯤으로 여기는 뿌리 깊은 제조업 중시 분위기가 있는 데다 정부도 이벤트성 정책만 내놓고 그마저 제대로 실천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조혜경, 서울=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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