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중앙시평

선거 불복은 없다

중앙일보

입력 2013.10.26 00:24

업데이트 2013.10.26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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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논설주간

1987년 대통령선거는 한국 민주주의에 꿈과 좌절을 선사했다. 유신과 신군부의 체육관선거에서 벗어나 대통령을 다시 내 손으로 직접 뽑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시골 구석구석까지 선거 열기가 달아올랐다. 그래도 야당 후보는 참패했다. 야당 후보가 갈라선 탓이다.

 이때 나온 것이 ‘컴퓨터 부정’이다. 한 신문이 개표가 반밖에 진행되지 않은 새벽에 끝자리 숫자까지 예언한 호외를 찍었다가 황급히 회수했다느니, 특정 후보 득표 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등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했다. 김대중 후보의 평민당은 이것들을 모아 두툼한 부정선거백서까지 내놨다.

 사실 그때만 해도 관권·금권선거가 기승을 부렸던 시절이다. 후보 간에 치열한 청중 수 경쟁을 벌인 여의도 유세에는 민정당 노태우 후보 측이 각 행정단위는 물론 관변단체와 공기업·민간기업의 인력까지 강제 동원했다. 유세장에서 출석을 부르고, 일당을 나눠 주기도 했다. 여의도에서 가장 가까웠던 대방역 주변에는 전철에서 내리는 박수부대를 데려가기 위한 피켓이 잔뜩 쌓여 있었다. ‘○○2동’ ‘XX은행’…. 돈도 펑펑 쏟아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부정은 정말 헛짚은 것이었다. 하고많은 부정 중에 왜 컴퓨터 부정을 짚었을까. 가뜩이나 야권 후보 분열로 상처받은 민심은 싸늘했다. 설령 사소한 부정이 있었다 해도 국민은 결과를 뒤집는 것까지는 원치 않았다. 이 사건은 윤보선씨의 ‘정신적 대통령’과 함께 선거 불복의 대표 사례로 남았다. 5년 뒤에는 김대중 후보가 깨끗이 승복하고, 정계를 은퇴해 영국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5년 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다. 그것이 선거 ‘불복’과 ‘승복’을 보는 우리 국민의 정서다.

 며칠 전부터 다시 선거 불복 얘기가 나온다. 그러나 정작 문제를 제기한 민주당은 선거 불복이 아니라고 하는데, 새누리당은 선거 불복이라고 비난하는 기묘한 형국이다. 선거 부정을 비난하는 건 괜찮아도 불복(不服)으로 끌고 가는 건 국민이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서로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 댓글 사건은 지난 정부가 저지른 일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를 아는 상식인이라면 박 대통령이 개입했다고 몰아가기 힘들다. 사건을 처음부터 나오는 대로 엄정하게 수사해 단호하게 처벌했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박수를 받았을 수도 있다. 전두환 대통령 비자금 환수와 이명박 대통령 4대 강 감사로 지지도가 크게 오른 것과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권력 핵심의 일부 법률가가 지레 겁을 먹는 바람에 일을 터무니없이 크게 만들었다. 이들은 댓글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해 유죄 판결을 받으면 선거 무효 시비가 벌어지고, 야당 지지자들이 촛불을 들고 나와 이명박정부 초기 쇠고기사태 이상으로 정권에 타격을 입힐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제까지 수사 과정을 봐도 누군가 방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게 만든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부터 축소 논란이 있었다. 담당 수사과장이 폭로하고, 서울경찰청장이 기소됐다. 검찰이 선거법 위반을 적용한 이후 우연히도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소동과 사퇴가 이어졌고, 트위터 댓글과 관련해 국정원 직원을 구속한 뒤 검찰 수사팀장이 수사에서 배제됐다.

 집권당의 주요 당직자는 수사 기밀과 공소장 변경 취소 문제를 공개적으로 떠들었다. 의혹이 나오는 족족 여당 인사가 해명에 나섰다. 과거 정부의 일을 새 정부가 떠안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굳이 그렇게 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걸까. 왜 그런 바보 같은 일을 벌이는 걸까. 이제 댓글 그 자체보다 수사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 더 큰 화근이 되게 생겼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국가기관의 정치 개입 내지 선거 개입 의혹이다. 그것은 과거 정부가 벌인 일이다. 정치적 중립이 반드시 지켜져야 할 국가기구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했다면 그 숫자가 많든 적든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길은 하나다. 진실 규명-책임자 처벌-제도 개혁이다. 이제라도 국민이 신뢰할 사람에게 수사를 맡겨 실제로 벌어진 일을 그대로 밝혀내 공개하고, 단호하게 처벌하는 게 정도다. 잘못된 보고로 초기 수사에 잡음을 일으키고 정권에 부담을 안긴 사람이 있다면 책임을 물어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발 방지다. 다음 선거를 위해서도 국정원과 군이 정치(선거) 개입을 못하도록 단단히 막아 놓아야 한다. 야당의 요구처럼 대통령이 사과할 일은 아니다. 지난 정부가 한 일이다. 다만 이제라도 잘못된 수사 과정을 바로잡는 일은 대통령의 몫이다. 야당도 그 이상 가기는 어렵다. 지금이라도 후유증을 없애고,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길이다.

김진국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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