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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예비군 훈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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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 14일 오전 9시 경기도 용인의 한 군부대. 푸른 군복을 입은 예비군들이 연병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선배님들! 고무링과 전투모를 착용해 주십시오.” 현역병 조교의 외침에 예비군들은 귀찮은 듯 주섬주섬 옷차림을 정리했다. 올해 예비군 4년차인 기자도 이날 동원훈련에 참가했다.

 입소식을 마치고 들어간 생활관엔 배정된 자리마다 명찰이 놓여 있었다. 예비군 3년차 김상일(27)씨는 자신의 명찰을 확인하고 어리둥절했다. 명찰에 적힌 보직이 운전병이었기 때문이다. 경기도 양평에서 2년간 정훈병으로 현역복무했던 김씨는 운전면허가 없다. 김씨는 “이것보다 황당한 일이 있을까요”라며 기막힌 듯 웃었다. 하지만 그는 이튿날 실시된 주특기교육에서 결국 군용트럭을 몰았다. 훈련 시작 전 김씨는 훈련 교관에게 “면허가 없는데 사고라도 내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교관은 “운전연습한다고 생각하고 한번 몰아보라”고 답했다. 김씨가 몰던 트럭은 연병장에 그려진 S자 코스를 통과하며 길 표시를 해 둔 삼각대를 여러 번 쓰러뜨렸다. 조수석에 현역 운전병이 동승한 상태였지만 변속기어가 수동인 군용트럭을 제대로 운전하는 데 도움을 받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군 규정상 군용차량을 몰기 위해서는 1종 보통 이상의 면허를 보유하고 각군 수송교육대에서 자격면허를 취득해야 한다. 그러나 예비군 훈련에서는 이런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김씨는 “앞으로 예비군훈련을 받을 때는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병무청에 민원을 접수하겠다”고 말했다.

331명 중 36%가 현역 때 주특기와 무관

 같이 훈련을 받던 예비군 3년차 조홍철(27)씨는 헌병 보직을 받았다. 그는 2년 동안 소총수로 복무했었다고 했다. 조씨는 “지난해 동원훈련에서는 지게차를 몰았는데 올해는 조금 낫다”고 말했다. 그는 “지게차를 지난해 처음 운전해 봤고, 옮기는 물건이 탄약 등 위험물이어서 불안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동원훈련을 받은 예비군 331명 중 120명(36.3%)이 김씨처럼 ‘비적소(非適所)지정’을 받았다. 비적소지정은 현역 때 부여받은 주특기와 무관한 특기를 동원훈련에서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군 전역자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예비군 동원훈련의 보직 부여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는 글이 많다. ‘의경 출신인데 예비군 훈련에서 박격포를 쐈다’ ‘포병 출신인데 의무병 보직을 받아 동원훈련 내내 붕대만 감았다’ ‘통신병 출신인데 예비군 때는 전차수리 보직을 받았다’는 등의 내용들이다.

 평화재향군인회 김기준 대표는 “익숙하지 않은 주특기를 동원훈련 중 수행하면 안전사고 위험성이 커진다”며 “과거 연천 예비군 폭발사고와 비슷한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고 우려했다.

연천 포사격 중 사망사고 반복될 우려

 연천 예비군 폭발사고는 1993년 6월 경기도 연천의 동원 예비군 훈련장에서 포사격 훈련 중 포탄이 터져 예비군 16명, 현역 4명이 숨진 사고다. 당시 현장에 있던 예비군들은 포병이 아닌 다른 병과 주특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예비군의 보직 부여에 관한 책임은 병무청과 현역부대에게 있다. 기자와 김씨가 입소했던 예비군 부대 지휘관은 “지역에서 무작위로 모이는 예비군 특성상 모든 예비군에게 적절한 보직을 부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병무청 김용두 부대변인은 “부여받은 보직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예비군 지휘관에게 보직 변경을 신청하면 임무를 바꿔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필중 대전대 군사학과 교수는 “유사시 예비전력을 즉각 전방에 투입하려면 현역 시절 주특기를 지속적으로 숙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각 분야 전문병사를 양성하는 이스라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장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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