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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명예의 전당(28)-사이 영(1)

중앙일보

입력

메이저리그 1세대를 대표했던 선수였지만 1936년(이하 한국시간) 처음 있었던 명예의 전당 헌액 대상자 발표에서 빠진 선수가 있었다.그 주인공은 바로 사이 영으로 팬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는 덴튼 트루 영이었다.

사실 베이브 루스나 타이 캅이 타자로서 메이저리그 초창기를 대표했던 선수라면 투수로서는 당연히 사이 영은 월터 존슨이나 크리스티 머튜슨과 함께 이 같은 초창기 선수들의 위대했던 한 명이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36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들은 타이 캅,월터 존슨,크리스티 머튜슨,베이브 루스,호너스 와그너의 5명이었으며 영은 이듬해인 1937년에 나폴레온 라조이,트리스 스피커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다소 아쉬움을 남겼던 것이다.

영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500승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였으며 그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현재 양대리그에서 그 시즌의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상인 사이영상의 효시가 되었던 바로 그 선수였다.그러나 정작 영은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이 제정되기 1년 전에 사망함으로써 자신이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투수라는 평가를 직접 느낄 수는 없었다.

한 때 미국의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자료에 의하면 그의 통산 511승은 가장 깨지기 어려운 기록으로 나타났다.현대야구에서처럼 역할분담이 확실해진 것 때문에 사실상 영의 기록은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영의 511승은 한 시즌 평균으로 본다면 23승씩 올렸다는 것이 된다.이 사실만으로도 영의 업적은 놀랄 만하지만 더욱 경이적인 것은 영이 이것을 무려 22년 동안이나 해냈다는 사실이다.

또한 영은 생애 통산 751번의 완투경기를 펼쳤는데 이 또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현역 선수로서 가장 많은 완투경기를 펼친 로저 클레멘스(뉴욕 양키스)가 116경기를 완투했으며 현역 선수로서 100경기 이상을 완투한 선수가 클레멘스와 그레그 매덕스(102경기 완투)의 2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영의 완투 기록은 그의 최다승 기록처럼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더구나 영의 호적수로 평가받는 월터 존슨의 완투 기록은 531경기로 영의 기록과 200경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완투부문에서 상위에 올라 있는 그 대부분의 선수들은 1900년대 이전에 은퇴했거나 1900년대 초반을 끝으로 은퇴했던 초창기의 선수들이었다는 사실은 영의 완투기록이 불멸의 기록이 되리라는 것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가장 최근의 선수였던 워렌 스팬(1965년 은퇴)도 영의 절반 정도인 382경기만을 완투했을 뿐이었다.

영이 가진 역대 최고의 기록은 물론 이 2개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그가 통산 기록했던 7356 투구이닝도 역대 1위의 기록이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영만이 6000 이닝 이상을 던졌을 뿐이었다.

영은 동부 오하이오주의 한 농장에서 자라났다.그리고 그가 빅리그에 올라갔을 때에도 그는 아직도 앳된 젊은이였다.그가 집을 떠났을 때에는 그는 덴트 영으로 알려졌지만 머지 않아 영에겐 그가 가진 눈을 감게 만들 정도의 빠른 공 때문에 사이클론을 의미하는 사이(Cy)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영이 집을 떠나 처음 정착한 곳은 트라이스테이트리그의 캔튼이었다.영은 곧바로 15승 15패를 기록했고 곧 메이저리그 구단으로부터 500달러에 입단 제의를 받았다.그것은 단지 스파이더스 구단이 일종의 도박을 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적으로 발행되는 주간 스포츠지에는 "클리블랜드 구단의 새로운 투수 영은 크고 강한 시골소년"이라는 내용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시카고 콜츠(현 시카고 컵스)의 빌 허치슨보다 더 빠른 공을 던지며 그의 떨어지는 공은 가히 살인적이다"라고 소개되었다.당시 콜츠의 허치슨은 내셔널리그 최고의 투수로 1890년 42승,1891년 44승을 기록했던 투수였다.

영의 승리들 중 3경기는 노히트 경기(무안타 무실점 경기)였는데 1897년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6 대 0의 첫 노히트 경기를 펼쳤다.이 경기에서 영은 단 한 명의 타자만을 볼넷으로 진루시켰을 뿐이었다.

1899년 영은 소속팀인 스파이더스의 구단주였던 제임스 로빈슨의 다른 구단인 세인트루이스 퍼펙토스(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팀을 옮기며 세인트루이스로 이동했다.그는 연봉 2400달러를 받으며 내셔널리그 최고액 연봉자가 되었다.그 때 새로운 리그로서 아메리칸리그를 만들고 있었던 밴 존슨이 보스턴 레드삭스로 오면 영에게 1년에 600달러를 더 주겠다고 제의하였다.당시 영은 세인트루이스의 무더운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존슨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 때부터 영은 보스턴의 영웅이 되기 시작했다.이 때 34세였지만 영은 보스턴에서의 첫 시즌이었던 1901년에 33승 10패를 기록했고 371이닝을 던지는 동안에 불과 37명의 타자만을 볼넷으로 진루시켰다.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양대리그에서 모두 100승을 달성하였던 영의 위업 완수도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배길태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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