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도어 루스벨트부터 OPCW까지 툭하면 자격 논란

중앙선데이

입력 2013.10.12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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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호 08면

아흐메트 우줌쿠 화학무기금지기구(OPCW) 사무총장이 11일 네덜란드 헤이그 본부에서 노벨평화상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로이터]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화학무기금지기구(OPCW)가 지난 11일 선정된 이후 이 상을 둘러싼 공정성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OPCW가 과연 세계 최고 권위의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는 거다.

노벨평화상의 정치학

이 기구의 수상 이유는 “국제법 아래 화학무기 사용을 금기로 만드는 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간 국제사회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던 OPCW가 수상자로 뽑히자 “시리아의 화학무기 폐기를 의식한 정치적 결정 아니냐”는 비판이 일고 있다.

노벨평화상은 그간의 업적으로 수상자를 결정하도록 돼 있다. 자연히 시리아에서 수백 명이 유독가스로 살해당하는 걸 막지 못한 OPCW에 어떻게 상을 주느냐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앞으로 잘하라는 뜻이냐”는 비아냥도 나온다. 지난해 유럽연합(EU)에 이어 올해에도 유럽에 근거를 둔 국제기구가 연달아 상을 받게 된 것도 시빗거리다. “지나친 유럽 편향 아니냐”는 지적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선정되면 이를 둘러싼 논란 없이 넘어갈 때가 드물었다. 2011년 노르웨이의 유력지 아프튼포스텐은 “노벨평화상이 (노르웨이) 정부의 외교정책과 경제적 이익을 위한 도구로 이용돼 왔다”고 맹렬히 공격했다. 노벨 친형의 손자이자 저명한 과학자인 마이클 노벨도 극히 비판적이다. 그는 “노벨위원회가 유지(遺志)와는 달리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며 “노벨평화상이 정치화됐다”고 꼬집었다.

카터 선정 이유는 “부시 비판 위해”
노벨평화상을 둘러싼 논란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받아선 안 될 인물이 수상했다는 것과 세계적 평화운동가가 빠졌다는 거다.

부적절한 수상 시비는 1901년 이 상이 처음 수여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됐다. 첫 논란의 인물은 1906년 수상자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수상 이유는 러일전쟁의 종전을 중재해 동북아에 평화를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일본의 조선 침략을 묵인하는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주도해 그의 자격을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73년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과 레득토 북베트남 대표의 수상도 논쟁을 불렀다. 베트남전쟁의 정전(停戰)을 이끌어냈던 파리평화협정의 성공적 타결이 업적으로 꼽혔다. 그러나 베트남전쟁 상황이 계속돼 레득토는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이에 심사위원 두 명이 사임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로비 의혹이 불거진 적도 있었다. 74년 수상자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일본 총리의 사례다. 사토는 ‘일본의 비핵 3원칙’을 확립했다는 이유로 상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가 정적이던 그를 회유하기 위해 전방위 로비를 펼친 덕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게다가 수상 이유인 비핵 3원칙, 즉 “핵을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들여오지도 않겠다”는 정책도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나중에 공개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사토는 핵무기를 실은 미 함정의 일본 기항을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핵무기 자체 개발도 검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의 앨 고어 전 부통령(2007년 수상)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2007년 환경운동으로 노벨평화상을 거머쥔 고어는 ‘위선적인 이중인격자’라는 공격을 받았다. 호화스러운 생활방식 탓이었다. 그는 환경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로 지구온난화의 위험성을 경고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미 언론은 환경 보호와는 전혀 딴판인 그의 호화생활을 물고 늘어졌다. 내슈빌에 방 20개짜리 저택을 소유한 그가 일반 가정의 20배나 되는 전기를 써왔다는 것이다. 더불어 “개인 제트기를 타고 다니며 엄청난 배기가스를 뿜어댔다”고 비난했다.

최근 몇 년 새 가장 큰 논란을 낳은 건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수상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소식에 전 세계는 깜짝 놀랐다. 당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나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오바마의 신념에 대한 격려의 의미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오바마가 한 게 뭐냐”는 비판도 거셌다. 취임 8개월밖에 안 됐던 오바마는 중동 분쟁 종식에 노력했을 뿐 정작 이라크·아프간 전쟁에서 뚜렷한 성과를 낸 게 아니었다. 미국 내부적으로도 의료보험 개혁과 경제위기 극복 등 현안이 산적한 상태였다. 그래선지 오바마에게 특별한 호감을 갖고 있는 노르웨이 좌파 심사위원들이 그릇된 판단을 내렸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민주화를 명분으로 한 내정간섭이란 논란을 빚은 때도 적지 않았다. 2010년 수상자인 중국의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가 그랬다. 당시 중국 정부는 ‘실정법을 위반한 죄인에게 상을 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89년 수상자인 달라이 라마도 노벨평화상의 취지, 즉 인류 평화와 전쟁 방지에 기여한 인물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적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친중국 진영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티베트 분리독립 운동을 주도해 왔다.

간디 추모 위해 달라이 라마 선정설
이와 함께 노벨평화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위대한 평화운동가들을 외면하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인도가 낳은 비폭력·무저항 운동의 대명사 마하트마 간디다. 무저항 운동을 몸소 실천했던 그는 노벨위원회가 스스로 자인할 정도로 노벨평화상 수상자 감이었다. 실제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위원장인 게이르 룬데스타드는 2006년 “100여 년의 노벨상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누락은 마하트마 간디”라고 고백한 바 있다. 노벨위원회가 간디를 수상자로 검토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는 1937년부터 4회에 걸쳐 후보에 올랐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인도 독립운동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영국의 반발 때문에 간디는 끝내 상을 받지 못했다. 그래선지 노벨위원회는 간디가 숨진 1948년에는 ‘마땅한 후보가 없다’며 노벨평화상을 수여하지 않았다. 89년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에게 이 상을 줄 때도 노벨위원회는 “간디에 대한 추모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미국의 저명한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간디 외에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했을 인물들을 다룬 적이 있다. 여기엔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였던 엘리너 루스벨트,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 등이 포함돼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아내인 엘리너는 과거 조용한 내조에만 머물렀던 퍼스트레이디의 이미지를 바꾼 인물이다. 그는 대공황과 2차 대전으로 피폐해진 미국의 국민을 다독여 미국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하벨은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의 상징으로 통하는 ‘77헌장’을 완성하는 등 이 나라를 공산독재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아키노는 반독재 투쟁을 하던 남편이 암살되자 대선에 출마했다. 대통령이 된 그는 반체제 인사를 사면하고 과감한 민주화 조치를 단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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