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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증거 쏟아지는데 법원 인정 잣대는 오락가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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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호 14면

11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디지털포렌식연구소에서 담당수사관이 정보 분석 프로그램을 들여다보고 있다. 최정동 기자

●사례 1=A씨는 2005년 6월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결정적인 증거로 A씨의 컴퓨터에서 나온 한글 문서를 제시했다. 문서엔 B씨를 비방하는 내용이 있었다. 법원은 1심에서 대법원까지 검찰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A씨는 디지털 분석 업체의 분석을 토대로 “검찰이 증거로 제시한 한글 문서의 최초 작성일이 사건 발생일 이후인데 법원이 잘못 판단했다”며 재심 신청을 했다. 법원은 드물게 이를 받아들여 이 문서의 증거력은 부인됐다.

검찰 수사로 본 디지털 증거 능력의 세계

●사례 2=C씨는 지난해 경남 창원의 한 포장마차에 불을 지른 혐의로 고소됐다. 포장마차 주인 D씨는 “C씨가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다 불을 질렀다”며 사진 한 장을 증거로 제출했다. 사진에는 C씨가 라이터로 불을 지르는 듯 보이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대검찰청 과학수사센터의 분석 결과 사진은 위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D씨가 자신의 부인에게 관심을 보이던 C씨에게 앙심을 품었던 것이다. 결국 C씨는 무혐의 처분을 받고 D씨에겐 증거위조 혐의로 벌금 200만원이 선고됐다.

아날로그 장치가 디지털로 대체되고 있는 요즘, 디지털 증거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검찰의 디지털 증거 수집·분석은 2008년 916건, 2009년 1546건에서 2012년 6301건으로 급증했다.

조작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게 관건
디지털 증거란 디지털 방식으로 저장된 정보로 USB·플로피디스켓·하드디스크·휴대전화 등 전자기기에 저장된 증거다. 같은 녹음기라도 아날로그 녹음기로 녹음된 내용은 디지털 증거에 포함되지 않는다. 디지털 증거엔 아날로그 증거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훼손 가능성’이다.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장 임종인 교수는 “디지털 증거는 많은 양을 한꺼번에 삭제하거나 위·변조하기가 쉽기 때문에 증거의 신뢰성을 쉽게 잃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법정에선 디지털 증거의 증거 능력을 둘러싸고 논쟁이 거듭되고 있다.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노명선 교수와 2005년 이후 디지털 증거 능력에 대한 주요 판결 5건(왕재산 사건, 김홍복 인천 중구청장 공갈 사건, 2008년 변호사법 위반 사건, 일심회 사건, 2006년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살펴봤다. 그 결과 디지털 증거가 증거로서 인정받는 데 필요한 ‘대원칙’은 있었지만 검증 방법에 대한 세부 표준이 없었다. 이 때문에 디지털 증거의 신뢰성을 두고 지루한 ‘공판 투쟁’이 이어지거나, 재판부에 따라 채택 여부가 달라졌다.

지금까지 사법부는 디지털 증거의 증거 능력에 대해 대법원 판결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 2007년 일심회 사건 판결 땐 ‘원본에 저장된 내용과 출력된 문건의 동일성(同一性)이 인정돼야 한다’고 했다. 2013년 왕재산 사건 판결에선 ‘정보저장매체 원본이 압수부터 문건 출력 때까지 변경되지 않았다는 점, 즉 무결성(無缺性)이 담보돼야 한다’고 판결했다.

법조계는 판례에 따르면 디지털 증거가 증거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요소는 ‘동일성’ ‘무결성’이라고 본다. 즉 조작되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정에서 ‘디지털 증거가 조작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례 3=디지털 증거 전문가인 모 대학의 김수인(가명) 교수는 ‘왕재산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했을 때를 생각하면 기가 막히다. 당시 법정에서 증인 심문은 아래와 같이 진행됐다.

피고 측 변호인=“디지털 증거가 조작되지 않았다고 확신합니까.”
김 교수(검찰 측 증인)=“학자적 양심을 걸고 확신합니다.”
변호인=“원본을 복사할 때 화장실도 가지 않았습니까.”
김 교수=“화장실을 가긴 했지만 도중에 조작 시도가 있었다면 에러가 뜨도록 돼 있습니다.”
변호인=“학자적 양심이 있다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참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김 교수=“복사 중엔 조작이 불가능하고 조작이 성공해도 해시값(전자문서의 동일성을 확인해 주는 값)이 바로 달라져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변호인=“그래도….”

김 교수는 “5명의 변호인이 돌아가면서 같은 질문을 되풀이해 정신이 없었다”며 “결국 재판부가 조작 가능성이 없다는 의견을 받아들였지만 소모적인 논쟁이 너무 오래 계속됐다”고 말했다. 왕재산 사건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조작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아무런 사정을 발견할 수 없음에도 피고인들은 별다른 근거 없이 증거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적극적으로 사회의 분열과 혼란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판결문은 또 “피고 측이 불필요하게 너무 의혹을 많이 제기했다는 점도 형을 늘리는 데 고려됐다”고 공개했다. 임종인 교수는 “전문성이 없으니 증거를 바탕으로 실체적 진실을 다투는 게 아니라 원론적 논쟁만 하게 된다”고 말했다. 디지털 증거는 경우에 따라 인정되기도 하고 무시되기도 한다.

●사례 4=2012년 9월 대법원은 형제와 분쟁 중인 토지조합에 조정을 강요한 ‘김홍복 인천 중구청장 공갈 사건’에서 디지털 녹음기로 녹음한 음성파일 녹취록을 증거로 인정했다. 판결문은 “편집되거나 인위적 개작이 없다. 대화자들이 진술한 대로 녹음된 것으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사례 5=그러나 디지털 녹음기로 녹음했다고 해서 다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2008년 12월 변호사법 위반 사건 판결에선 증거로 인정받지 못했다. 대법원은 “고소된 횡령사건을 무마해 주겠다”며 돈을 받은 혐의로 변호사 A씨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원심(고등법원)을 파기 환송시켰다. 원심은 “8000만원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네”라고 답하는 대화가 기록된 녹음 파일 사본으로 작성된 녹취록의 증거 능력을 인정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의 검증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녹취록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피고인이 편집된 것 같다고 주장하는데도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고등법원은 녹음파일 사본과 녹취록이 일치하는지를 따졌을 뿐 사본과 원본의 일치 여부는 따지지 않았다고 적시했다.

이에 대해 IT전문 법률사무소 민후의 김경환 대표변호사는 “재판부에 따라 디지털 증거 능력이 달라지는 것은 문제다. 검증 방식에 대한 기준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재 검찰은 예규(410호)로 디지털 증거 취급 방식을 명시한다. ▶디지털 증거를 수집할 때는 수사에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서 실시하고 ▶압수·운반·분석 때 포렌식(법과학) 장치를 통해 증거가 변경되지 않도록 하며 ▶압수 및 분석 과정을 기록해야 한다는 식이다. 대검찰청 디지털수사담당관 김영기 부장검사는 “수요가 급증하는 데 비해 여건은 그대로라 힘들지만 교육과 연구에 힘쓰면서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모자란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포렌식학회 부설 디지털포렌식연구소 김용호 소장은 “관계기관들이 공유할 수 있는 ‘디지털 증거에 대한 표준’을 정해야 한다”며 “한국엔 디지털 증거의 압수에 대해 형사소송법의 일부 규정이 적용되지만 미국은 광범위한 디지털 증거 관련 법률이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민사소송에서는 ‘E-디스커버리법’이 적용된다. 지난해 적용되기 시작한 이 법은 법원의 증거 제출 명령에 따라 디지털 증거를 자진해서 제출해야 한다. 이때 디지털 증거를 훼손·조작·누락한 사실이 드러나면 재판 결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된다.

그러나 우리 실정은 다르다. 압수수색이 시작되면 수사관을 막고 주요 파일을 삭제하기 바쁘다. 지난 8월 28일 새벽 이석기 의원이 연루된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해 의원실 압수수색에 나선 국가정보원을 당원들이 막아 결국 압수수색이 다음날 이뤄진 것도 이런 사례다.

형사정책연구원 탁희성 박사는 “최소한 검찰과 법원이 합의해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고 거기에 맞춰 증거를 분석하면 불필요한 논쟁을 없애면서도 보다 더 공정한 재판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립적인 ‘디지털 국과수’ 설립해야”
소모적인 논쟁을 줄이기 위해 법원 소속의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를 두거나 중립적인 ‘디지털 국과수’를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중립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잇따르고 있다. 한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는 “법원과 변호인들은 우리를 ‘수사기관으로부터 하청받는 사람’이라 보고 중립성을 의심한다. 법원에서 전문가를 고용해 검증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례 6=민주당 한 의원의 선거사무장 남모(32)씨는 지난해 4·11 총선 때 선거사무원으로 등록되지 않은 이들에게 돈을 주고 선거운동을 시킨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 측에서는 압수한 USB의 문건을 중심으로 남씨의 혐의를 입증하려 했다. 그러나 남씨는 법정에서 “압수된 USB에 저장된 문서가 진본이냐”는 검사와 재판부의 질문에 묵비권을 행사했다. 대법원은 “남씨가 진술을 거부하고 있는 이상 증거 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확정했다.

검사 출신의 한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는 “피고인이 컴퓨터를 사용한 시간기록과 문서가 작성된 일시가 똑같은 것을 밝혀도 피고인이 내가 작성하지 않았다고 해버리면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탁희성 박사는 “디지털 증거에 대해서는 디지털 환경에 맞는 기준이 필요하다”며 “객관적 증거가 있으면 ‘내가 안 했다’고 우겨도 증거로 인정하는 등의 합리적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인성 한양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피고의 컴퓨터에 있는 문서라고 해서 다 피고가 작성했다고 볼 수 없다. 디지털 정보의 특성상 더욱 엄격하게 적용해 한 명의 억울한 사람도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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