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6·25」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국방부정치국에서 관할하는「대한학도 의용대」소속의 북한 파견 선무원들은 대체로 50년 10월 중순부터 부푼 희망을 안고 이북으로 들어갔다. 특히 자기 고향으로 가게 된 대원들의 기쁨과 감격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평균 30명 내외의 학생 대원들이 각 도에 분산 배치되어 주로 선무공작과 현지 학생들의 지도를 맡아보았다.
정훈국에서는 1차에 이어 2차로 북한 파견 대원을 모집하여 도 본부 이외에도 이북 각군에 2명꼴로 선무원을 파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북한에 갔던 학도선무대원들은 실의에 잠겨 후퇴했고 2차로 모집했던 대원들은「정훈대대」로 모습을 바꾸어 남한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전회의 황해도에 이어 이번에는 평안도와 함경도에 들어갔던 선무대의 활약상과 후퇴할 때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북한학도돤도 조직하고>▲김재부씨(당시 서울대상대재학=대한학도의용대평안도파견선무대장·현국회의원·48) 『3개월 적 치하에서 숨었다가 나왔는데 9·28 수복후에 합동수사본부에서 나더러 서울대학 심사위원장이 돼 달라고 하더군요. 좌익계 부역학생들을 잡아서 심사하는 일이지오. ABCDEF까지 6종류로 구분해서 C급까지의 해당자는 처벌을 건의했지만, D급 이하는 훈계 석방토록 했읍니다. 하루는 그때의 대한학도의용대 본부장인 손도심씨를 만나 내 고향 평양에 가고싶은데 길이 없겠느냐고 물었죠.
학도의용대에 들어가면 된다고 해서 그길로 입회했지요. 10월 중순께 내가 파견대장이 돼서 30명의 대원을 인솔하고 평양으로 떠났읍니다. 평안남도청에 가서 김성주(고인) 지사 대리와 미원영(현국회의원) 공보과장을 만나, 우리가 파견돼온 뜻을 이야기하고 협조를 부탁 했더니 잘 들어 줍디다. 그 다음에 미군 고문「먼스키」대령에게 평남에서도「학도의용대」를 조직하겠다고 했더니 처음에는 우리를 의심하면서 반대를 해요. 그래서 우리의 목적을 자세히 설명하니까 비로소 납득합디다. 그래서 학교마다「북한학도단」을 조직했지오. 지하에 숨었던 우익 학생들이 나와서 적극 협조해주어서 일하기가 쉬웠읍니다. 이때 우리들은 군복만 얻어 입고 교모는 그대로 쓰고 갔는데 이런 모습이 현지 주민이나 학생들에게 퍽 호감을 주었나봐요. 물론 부러웠을 거고요. 각 군에도 대원들이 나뉘어 나가서 시국 강연회를 여는 등 선무활동을 했어요. 이러다가 전세가 악화되어 우리 선무대는 12월2일에 평양을 뒤로 했읍니다. 능라도 부교로 빠져 나오는데 검문검색이 매우 심하고 까다로와서 우리와 함께 일하던 이북학도단 요원이 많이 못나봤어요. 이들이 적 치하에서 다시 갖은 박해를 받을 것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디다. 이때 다행히 함께 남하한 이북학생 동지로서는 현재 문국령 우교직 김순성제씨가 많은 활약을 하고 있읍니다.』

<한계화여사도 이때 남하>▲양병후씨 (당시 국민대재학=대한학도의용대함경도파견선무대장·현토건업·51) 『대전서부터 학도의용대에 들어갔는데 9·28수복후 청계국민학교에서 이북에 갈 선무대에 지원하여 2주일 훈련을 받았습니다. 나는 북한파견 학도의용대 1기생으로 임시군번 D27을 받고 함경도 파견대장의 임명상을 정훈 국장한데서 받았어요. 여자대원도 5명이 낀 50명의 우리 함경도 대원은 10월 중순에 걸어서 서울을 출발했는데 동두천서 잔비를 만나 서울로 되돌아 왔어요.
육로보다는 해로가 더 빠르고 안전할 것 같아서 기차로 부산으로 내려 갔읍니다.
해군 당국과 교섭해서 LST 홍천호를 얻어 타고 10월25일에 원산에 상륙하여 여기서부터는 도보로 함흥으로 갔죠.
함흥시에 본부를 설치하고 이북 학생들에 대한 선무를 시작했습니다. 당장에 3천여명의 이북 학생들이 모여듭디다.
이들에게 우리 헌법도 가르치고 간단한 군사훈련도 시켰어요. 때로는 현지 학생들과 협동해서 지하에 숨은 공산주의자들도 색출했지요. 원산과 흥남에는 10명씩 대원을 상주시켜 일을 시켰읍니다. 또 어떤때에는 일부 대원은 헌병대에 차출되어 그편 일을 돕기도 했고요. 이러다가 11월말에 중공군이 나와 후퇴를 했는데 우리 대원은 이때에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을 많이 했어요.
헌병대에서 우리 대원중 이북에 있는 가족이나 데리고 갈 사람들의 명단을 제출하라는 연락이 왔어요.
수천명의 이북학생과 민간인들이 같이 남으로 데려다 달라고 우리를 붙잡고 매말려요. 1군단 통신참모 한당욱 중령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트럭」5대를 빌었어요. 이 차량으로 남학생 2천5백명과 여학생 4백여명을 우리 대원들이 보살피며 싣고 나왔죠.
전번의 일본「삽보로」빙상경기때 화제를 모은 한주화여사도 이때 우리가 데리고 나왔습니다. 한여사는 함흥 여중생이었는데 노래를 아주 잘 부르던 기억이 납니다. LST를 타고 철수하는데 갑판 위에 올라가 보니, 쇠사슬에 묶인 3백여명의 이북 좌익분자들이 쭈그리고 앉아 있습디다. 우리더러 이자들을 감시하라고 해서 배 위에서는 그일을 수행했지요. 이자들을 묵호에서 끌어내서 헌병대에 인계하더군요.
거제도에 도착해서 이북서 데리고 온 학생들을 13개 면에 분산 수용했어요. 3천여명의 학생중에는 약간의 용공분자도 끼여있어 색출해 냈지요. 처음에는 거제도에서 이들 학생에게 선무와 훈련을 시켰지만, 우리 선무대 힘으로는 유지해 나갈 수가 없어요. 할수 없이 마산의 101부대(주=노무사단) 김응조 사단장을 찾아가 학생들을 받아달라고 했더니 좋다고 승낙을 합디다.
남학생 대부분은 이선량정훈국장 입회하에 입대식을 갖고 101부대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방위군에 입대 시켰읍니다. 여학생들은 친척이 있는 사람은 찾아보내고 나머지는 방직공장 등을 찾아다니며 취직도 시켰어요. 그래도 오갈데 없는 불쌍한 여학생들이 있어 구호에 퍽 애를 먹었읍니다. 자유를 찾아온 이 학생들은 실망이 컸을 거예요. 51년4월에 우리 대원들은 모두 복교했읍니다.』

<평양가다 소리원서 막혀>▲장봉석씨 (당시홍재대재학=773부대원·현「코리어·헤럴드」업무국장·42) 『9·28 수복후 학교에 나갔더니 정훈국에서 정훈대원을 모집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길로 입대했읍니다. 나는 773부대 5중대에 소속되어 기차로 사리원까지 들어갔어요. 중대마다 여학생도 2, 3명씩 있었어요. 학생은 아니지만 한치옥양은 머리까지 깎고 군복차림으로 남자대원과 같이 행동했어요.
우리 중대원중 몇명은 평양까지 들어갔지만「유엔」군의 후퇴로 우리는 사리원서 개성을 거쳐 서울로 도로 내려왔습니다. 애초에 이북에서 선무하려던 우리 부대의 목적은 허물어진거지오. 나도 이북서 단신 월남해서 큰 꿈을 가지고 올라갔던 것인데 허무하게 됐지요.』
▲윤하규씨 (당시 용중6년재학=772부대원·현한국수산개발공사비서실장·39) 『10월 하순에 학도의용대를 통해 정훈대대에 들어갔습니다. 대부분이 학생이었고 정훈국서 뽑은 일반 민간인도 얼마 있었어요.
서대문 국민학교에서 한달 동안 훈련을 받았는데 우리 부대는 이북 1개군에 2명씩 들어가기로 됐어요. 훈련중 군기간 장교가 없어 몇 사람은 임관돼 중대장 소대장직을 맡았죠. 내가 소속했던 제1대대는 대원이 3백여명이었는데 함경도와 강원도에 분산 배치하기로 돼 있었읍니다. 11월28일에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부산에서 배편으로 우선 원산으로 가려고 했던 거지오.
평안도와 황해도를 맡은 773부대는 육로로 떠났고요. 부산에 도착하니까 고아원 건물에 수용하면서 기다리라고 합디다. 여기서 한달 동안 자체 교육을 하면서 지냈죠. 이러다가 1·4 후퇴로 북한에 가려던 꿈은 사라졌어요. 이렇게 되니까 대원들이 모두 풀이 죽고 사기가 뚝 떨어집디다. 그러나 후방지역의 정훈공작을 맡기로 하고, 1중대는 전라남북에, 2중대는 경상남북에, 3중대는 경기 강원으로 분산해서 배치됐지요.』
다음은 학도의용대 여자대원들은 어떤 일을 했는가를 두 증인으로부터 들어보겠다.

<여학생들은 일선장병 위문>▲황량옥씨 (당시단대재학=학도의용대원·한범산고등공민학교장·51) 『나는 학도의용대에 들어가서 여학생부장을 했어요. 20여명의 우리 여대원은 정훈국에서 합숙훈련을 받았지요. 우리 대원중에서 몇은 정훈대대에 들어가 이북으로 선무하러가기도 했어요. 이북서 내려온 피란민 구호의 일익도 담당했고요.
담요·옷가지·식량 등을 모아 나눠주었지요. 그리고 엿을 만들어 두번 일선장병을 위문했습니다. 1·4후퇴때 우리대원은 1월3일에 한강을 넘었어요. 대구에 내려가서는 현지 여학생들을 포섭해서 대원에 넣었지요. 각 여행지를 다니며 반공사상 계몽 강연도 하고 응급치료법 등도 1주일씩 가르쳐 주었고요. 여학생들도 언제나 전선에 나가 싸울 각오를 갖도록 힘 썼지요.
그때는 학교 당국이나 학생들이 우리에게 적극 협조·호응해 주어서 보람있게 일을 했읍니다.』
▲오세숙씨 (당시진명여고재학=학도의용대원·현주부·38) 『9·28 수복후 학도의용대에 들어갔어요. 의용대에서 이북으로 정훈선무원을 파견한다기에 나도 꼭 따라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전세가 불리해서 못 가고 의용대 본부에서 일을 봤지요. 1·4후퇴땐 대구로 내려가서 대원들 옷도 빨아주고 밥도 지어주면서 의용대원들 뒷바라지를 해 주었지요. 아무래도 여자여서 별 이렇다할 활약은 못한 셈이지요.』
※알림=6·25당시 제11사단 9연대 3대대 정보장교였던 이종대씨(당시중위)는 중앙일보편집국「민족의 증언」담당자에게 연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