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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뒤 윌슨 때처럼 … 신고립주의로 가는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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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시리아 정부군의 화학무기 공격에 대한 징벌적 공습 보류, 말리의 이슬람분리주의 세력에 대한 공격 불참, 이집트 군부의 쿠데타와 무슬림형제단 시위대에 대한 발포 방관, 리비아 카다피에 대한 소극적 공격 지원….

 미국이 국제분쟁에서 발을 빼는 경향이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다.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집권 2기가 끝나는 2017년까지는 이런 추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고립주의로 회귀한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이를 두고 신고립주의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1983년 그레나다 침공과 86년 리비아 폭격, 빌 클린턴 정부의 보스니아(95년)·코소보(99년) 공습과 98년 아프가니스탄 테러리스트 미사일 공격, 조지 W 부시 정부의 아프간·이라크 침공 때 보여줬던 일방주의적 개입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시리아·말리·이집트 … 국제분쟁서 한 발 빼

 미국은 영국과의 독립전쟁(1775~1783) 승리 이후 전통적으로 불간섭주의를 천명해 왔다. 미국이 유럽 대륙의 문제에 끼어들지 않는 것처럼 유럽도 미국을 간섭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 때도 미국은 처음엔 개입하지 않았지만 독일군이 자국 상선을 공격하자 1917년 할 수 없이 참전을 선언했다. 고립주의에서 처음으로 탈피한 것이다.

 당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민주당 출신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은 종전 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 창설을 주도했다. 하지만 공화당이 다수였던 상원은 이를 부결시켜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을 무산시켰다. 유럽 각국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엇갈린 패권 다툼에 미국이 다시 얽혀들 이유가 없다는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다. 이는 미국이 다시 예전의 고립주의로 돌아가게 된 계기가 됐다.

 지금 상황이 당시와 닮아가고 있다고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CSM) 위클리 최신호가 진단했다. 유럽 대신 중동에서 손을 떼는 쪽으로 바뀌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으로 기록될 아프간전(2001년~)과 이라크전(2003~2011년)을 치르면서 지쳐버린 미국인들은 시리아 사태를 포함한 중동 문제 개입에 부정적이다. 미군 6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을 들인 결과는 공허하기만 했다. 특히 이라크전의 경우 잘못된 전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군사적인 수단으로는 더 이상 세계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례를 남기기도 했다. 리먼브러더스 사태를 시발로 2008년 찾아온 금융위기는 경제적·심리적으로 미국의 불개입을 더욱 부추겼다.

대테러 전쟁에 염증 … “개입해도 해결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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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론조사기관인 퓨 리서치센터의 앤드루 코헛은 “미국인들은 총을 멀리하고 자신의 정원을 가꾸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최근 조사에서 ‘대통령이 집중해야 할 분야는 국내 정책’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83%에나 달했다. 이전 수십 년 동안 3분의 2 이상이 미국의 적극적 개입에 찬성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 세계의 경찰 또는 판사, 미스터 해결사(Fix-it)로 적극 개입해 왔던 미국의 역할이 달라질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미 오리건주립대 크리스토퍼 니컬스 교수는 “우리가 개입하더라도 중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경험을 통해서 확고해졌다”고 분석했다. 국내 현안도 산적해 있는데 외국 문제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게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 분위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보스턴의 버클리 음대에 재학 중인 여대생 다이노라 로사리오는 “실업, 등록금 지원, 건강보험 등 우리 내부의 난제도 수두룩하다”며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세계의 모든 문제를 수리하는 배관공이 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는 외교정책에 보수적인 전통주의자와 진보 진영의 평화주의자 모두 미국이 유럽 문제에 얽혀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다. 오바마가 이번에 시리아 공격에 대한 의회 승인을 추진할 때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다. 공화당 랜드 폴 상원의원은 “시리아 정부군이나 반군 양쪽에 다 나쁜 점이 있다”며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얻을 수 있는 미국의 국익이 명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민주당 좌파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미국인 다수는 일방적인 군사개입이 아니라 외교적 해결을 원한다”고 한술 더 떴다.

 미국의 신고립주의 경향이 한동안 지속되겠지만 어디까지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있다. 소련 붕괴에 따른 냉전 종식 후 유일 수퍼파워로 글로벌 시대를 이끌어 왔던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 후처럼 고립지대에 머물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미 노스 텍사스대 제임스 미르니크 교수는 “최근 일종의 고립주의 행태가 있긴 하지만 이는 1920년대나 30년대와는 성격이 다르다”며 “미국이 계속 그럴 수는 없다”고 단정했다. 당분간은 영국·프랑스 등과 보조를 맞추면서 소극적인 공동개입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일부선 “히틀러 방관의 재앙 교훈 삼아야”

 미국 같은 강대국이 눈앞의 분쟁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치러야 할 대가도 만만치 않다. 도덕적 의무감, 민주주의적 가치 보호를 강조해 왔던 미국은 실제로 수단 다르푸르와 르완다에서의 인종 학살을 보고도 개입하지 않았다. 세계 경찰 미국이 인도주의적 재앙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이 지금도 거세다.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히틀러와의 유화정책을 주장해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도발을 방지하지 못한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체임벌린에 이어 총리가 된 처칠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할 것”이라며 강경하게 맞서 히틀러 나치를 격퇴시켰다.

한경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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