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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 위 기계장치의 정수, 아름다움의 철학을 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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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면

미국의 영화배우 겸 제작자 루시 리우. 까르띠에 탱크 앙글레즈와 함께.

손목시계. 커봐야 지름 45㎜ 정도다. 시계의 핵심 동력장치인 ‘무브먼트’는 가장 얇은 게 2㎜에 못 미친다. 시계 몸통 옆면을 기준으로 두꺼운 시계라도 두께 10㎜를 조금 넘는다. 공간을 차지하는 존재감으로 보자면 시계는 딱 이 정도다. 사람을 치장하는 액세서리 같은 기능으로 따졌을 때 시계의 역할이 별로 크지 않은 이유다. 크기·부피가 고만고만하다.

그런데 시계가 물리적 크기를 뛰어넘어 영역을 점점 넓혀가고 있다. 현재 시각을 표시하고,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기계 장치로서 시계 본연의 역할은 조금 뒤로 밀어둔 채다. 위성을 이용한 휴대전화 시계 같은 것이 기존 시계 기능을 대체하면서 한때 사라질 것만 같았던 손목시계. 시간 표시 기계장치로서의 지분은 분명히 줄었지만 현대 기계 기술을 집대성하고 장식미술 철학을 담아내는 매개체로서의 역할로 변신 중이다. 쇠를 자르고 깎아 만든 톱니 수십 개, 일일이 수공으로 연마해 제작한 작디작은 나사 등 아날로그 정밀 기계장치의 정수를 보여주는 게 요즘 손목시계다.

탱크 MC 스켈레톤.

동력장치 수명을 연장시키고, 중력과 자기장이 금속 동력장치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등의 기술적 발전은 어느 정도 평준화됐다. 훌륭한 시계 제작자라면 기술 수준에 있어서만큼은 더 뒤처지지도, 훨씬 뛰어나기도 힘든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 미학적 우수성, 감성적 매력이 시계 소비자들의 마음을 훔치는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우수한 기계장치에 머물 뻔한 손목시계가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수집가들의 마음을 흔드는 건 미학적 감성 덕분이다.

고운 모래가루로 그림을 그리고, 얇은 나무판을 이어붙여 각종 장식 형상을 그려내는가 하면, 찬 금속에 따뜻한 느낌을 더할 윤내는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기도 한다. 예부터 뛰어난 장인의 손길에서만 태어날 수 있었던 온갖 장식 기법들이 손목시계 제작 기술에 적용되고 있다.

손목시계를 둘러싼 시계 제작자들의 경쟁은 어느 지점에서 한계에 도달하게 될까.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이 미술품 경매에 경쟁적으로 나서듯, 예술적 감성이 충만한 시계에 눈을 돌리는 시계 수집가들도 점차 늘고 있다. 이들이 중시하는 항목이 무엇인지에 따라 고급 시계 제작자들의 향후 행보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요즘 시계 수집가들의 눈독을 들이는 건 어떤 작품일까. 유명 경매회사 ‘크리스티’에서 시계 전문가로 일하는 사빈 케글은 최근 미국 일간신문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시계 수집가들, 시계를 투자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에겐 물건 자체의 희소성뿐 아니라 물건이 간직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어떤 의미 있는 시계가 경매에 나왔을 때 구매자가 기꺼이 50만 달러(약 5억5000만원)를 지불하도록 하려면 그래야만 할 이유를 납득시켜야 하고 거기에 그럴 듯한 스토리가 필수”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요즘 시계 시장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짐작된다. 바로 ‘이야기’다. 시계에 담긴 매혹적인 이야기가 있어야 그 시계를 갖고자 욕망하는 사람도 많아진다. 이야기를 품은 시계를 사야만 당신의 시계를 부러워할 사람도, 시샘 섞인 질투의 시선으로 볼 사람도 늘 것이다. 적게 잡아 수백만원쯤 시계 사는 데 쓰려 한다면 당신의 시계가 품은 이야기에 우선 집중할 때다.

강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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