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산다는 건 떠나기 위해 걸어가는 것 우리도 곧 모든 걸 놔야겠지

중앙선데이

입력 2013.09.28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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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호 09면

‘70대의 예능 역습’으로 화제몰이 중인 ‘꽃할배’ 신구(77)가 이번엔 연극 무대를 평정했다. 9월 10일 서울 서초동에 오픈한 소극장 흰물결아트센터의 개관작으로 선보이고 있는 연극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10월 6일까지)로 중장년 관객들의 눈물샘을 제대로 건드린 것. 지난해 제 6회 차범석희곡상을 받은 이 작품은 작가 김광탁씨가 아버지를 떠나 보낸 실제 경험을 살려 그려낸 가족 이야기다. 나란히 연기인생 50년을 넘어선 배우 손숙(69)이 떠나고 떠나 보내는 부부를 실감나게 연기한다. 별다른 사건이나 갈등 없이 잔잔히 이별의 과정을 보여주는 1시간30분짜리 단출한 무대지만 “바로 내 아버지 이야기”라는 입소문에 더해 예능에서 진솔한 모습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신구 할배를 보러 온 관객들로 객석은 빈자리를 찾기 힘들다. 깊은 연기 내공이 배어 있는 무대 위 신구의 카리스마는 TV에서 보여지는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버지의 살냄새를 숨결 하나 놓치지 않고 그려내는 그에게 ‘연기 장인’이라는 타이틀이라도 붙여야 마땅할 듯싶다. 공연 직전 무대 위에서 만난 ‘할배’는 유난히 말수가 적었다. 데뷔 이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만큼 들떠 있을 법도 한데 평정심을 넘어 무심해 보였다. 명연기의 비결로 50여 년 연기인생을 회고하며 그럴듯한 연기철학을 들려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저 대본대로 상황에 따라 연기할 뿐”이라는 건조한 답변이 돌아왔다. 인터뷰는 한마디로 심심했고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녹취록을 곰곰이 곱씹어 보니 그가 화려한 미사여구로 자신을 포장하기를 애써 거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나 예능에서 보여지듯 그의 삶 자체가 ‘리얼리즘’을 향해 있고, 따라서 인터뷰도 ‘리얼리즘’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와의 대화 내용을 최대한 가감 없이 기록하는 것도 그가 추구하는 ‘리얼리즘’을 해치지 않고 싶어서다.

말기 암 환자 역으로 연극 무대 평정한 신구

전형적인 시골집 마당을 배경으로 간암 말기 아버지를 둔 가족의 일상이 과장 없이 사실적으로 전개된다. 무대 위 배우들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철저히 절제된 연기를 펼치지만 객석에선 훌쩍거림이 돌림노래처럼 끊이질 않는다. 죽음과 이별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 가운데 유독 이 무대가 주는 감동의 강도가 남다른 것은 세상 모든 이들이 부모에게, 자식에게, 배우자에게 깊숙이 품고 있는 미안함과 애틋함을 건드리는 극사실주의적인 대본의 공이 크다.

그러나 병든 아버지의 고달픈 심신을 치밀하게 묘사하는 배우 신구의 정교하고 세밀한 연기야말로 이 무대의 ‘갑’이다. 손발을 덜덜 떨며 신트림과 딸꾹질을 삼키고 호흡곤란으로 말문이 막혀 힘겨워하는 모습은 마치 우리 아버지의 고통을 보는 듯 진심으로 안쓰럽다. 그러다 죽음을 예감한 뒤 가버린 젊음과 아직 못 이룬 것들에 대한 분노를 놀라운 기세로 터뜨릴 땐 마치 나 자신의 일인 양 감정이 꿈틀댄다. 그를 다른 배우와 차별화시키는 바로 이런 디테일의 힘이 아닐까. 정작 본인은 “다른 분도 다 똑같이 하신다”며 손사래를 치지만.

-환자 연기가 정말 아픈 분처럼 리얼합니다.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그건 뭐, 각 역마다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요소들이 있잖아요. 어느 역이나 힘들긴 마찬가지예요. 이불 덮고 누웠다고 속에서 멍하니 있을 순 없는 거죠. 왜냐면 환자 증상을 이불 밖으로 표현해야 되는 거니까. 가만히 드러누워 있을 수가 없죠. 나보다 능숙한 사람은 더 사실감 있게 표현했을 테고.”

-간성혼수에 빠져 사경을 헤매는 역할이 심적으로 힘들진 않으신지요.
“심적으로 힘들다기보단 경험한 적이 없으니까 공부를 해야지. 간암 말기라는 막바지 상황에 처했는데 그런 걸 실제로 살면서 접해본 적도, 앓아본 적도 없고 ‘간성혼수’란 말도 처음 접하는 단어예요. 일차적으로 내가 조사할 수 있는 걸 찾아보고, 작가가 직접 체험한 거니까 그분에게서 구체적으로 얘길 들었죠. 거기다 상상력 조금 보태고… 그렇게 조합한 거예요. 아직 부족하고 끝날 때까지 계속 보완해 나가야죠.”

-연기하면서 어떤 장면이 제일 찡하셨나요.
“‘내가 왜 이 병이 걸렸나, 이건 내 병이 아닌데…’라는 대사가 아무래도…. 어느 한 부분보다 전체적으로 아버지가 얘기하는 게 잘 와 닿아요. 부모가 이와 비슷한 환경에서 돌아가신 분들이 보시면 새삼스러우실 것 같아. 꼭 암환자가 아니라 치매인 경우에도 가족들이 겪는 고통이나 슬픔이 이와 비슷할 테고.”

-죽음이나 이별을 다룬 작품은 많은데 이 작품만의 매력을 말씀하신다면.
“누구 말마따나 ‘숨 들이쉬었다 내뱉지 못하면 죽는 것’일 뿐이라는 걸 피부로 느끼게 돼요. 사실 죽음이란 게 항상 우리 옆에 있는 건데 그게 나하고 동떨어진 사건이고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바로 우리가 죽음과 같이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사람이 산다는 건 떠나기 위해 걸어가고 있는 거라는 말도 있잖아요. 우리도 곧 모든 걸 놔야겠지. 가는 거야 피할 수 없지만 이루지 못한 몇 가지가 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요. 살아생전에 계획한 것을 이룬 사람이 젤 행복한 사람이겠지.”

-선생님은 뭘 못 이루셨나요.
“거의 다 못 이뤘지 뭐(웃음). 다 이루고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직접 심은 홍매나무에게 ”너 내 알제? 내가 젊어서 얼마나 손발이 두터웠는지 너는 알제?” 하고 분통 터뜨리는 장면이 너무 에너지가 넘쳐서 더 가슴 아팠어요.
“그거는 사실 이 연극과는 동떨어진 환상적인 장면이지. 청춘일 때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홍매나무와 얘기하는 동안만은 간성혼수에 빠진 그 인물이 아닌 거잖아. 대사에 힘을 준 것도 아내인 홍매에 대한 사랑, 생에 대한 의지 같은 걸 나름대로 표현하려고 그런 거고.”

요즘 그는 한 케이블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순재·박근형·백일섭 등 이른바 ‘꽃할배’ 4인방 중에서도 의외의 자상하고 온화한 이미지를 보여주며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각기 개성적인 할배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짐꾼 이서진에게 애정 표현을 하는 등 주변을 살뜰하게 챙기는가 하면, 동료들에게 띄우는 영상편지에서는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까다롭고 엄한 존재로만 인식됐던 우리 ‘할배’들의 가슴에도 훈훈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새삼 보여주며 대중에게 성큼 다가선 것이다.

-요즘 ‘꽃할배’ 때문에 데뷔 이래 가장 주목받고 계신 건 아닌가요.
“글쎄, 난 어느 정도길래 ‘꽃할배 꽃할배’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길에서도 어린 애들부터 나이 든 분들까지 그런 얘길 하시더라구. 드라마도 아니고 예능 프로를 해가지고 이렇게 반응이 오는 거는 처음이죠. 이 인터뷰도 그래서 하는 거 아뇨. 사실 좀 귀찮지(웃음).”

-전에는 근엄하고 어려운 분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방송에서처럼 원래 그렇게 다정한 성격이세요?
“아니, ‘꽃보다 할배’에서 내가 다정해 보여요?(웃음) 난 전혀 그런 감정이나 계획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하는 거예요. 그게 드라마처럼 대본이 있고 연습하고, 그렇게 진행되는 게 아니잖아요. 글쎄 원래 내가 어땠는지 모르지만 오래 살다 보니깐 이 지경에 온 거죠.”

-카메라 앞에서 늘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하니 힘드시겠어요.
“카메라 앞이라고 좋은 모습만 보이려 애쓴다면 누가 그런 걸 봅니까. 그런 컨셉트라면 사람들이 즐겨볼 수 없죠. 그 프로는 사전 준비 전혀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진행되는 거니까. 하루 종일 네 사람 각자 마이크 차고 카메라가 따라다니고 화장실까지 쫓아오고, 잠잘 때는 코너에 밤새 돌아가는 카메라를 세워놓으니 24시간 생활이 그대로 다 잡히는 거죠. 처음엔 아주 불편했지. 욕하면 욕하는 것까지 다 잡아내니까 백 프로 노출되는 거 아뇨. 거기서 꾸며봤댔자 꾸며질 수가 없어. 그것 때문에 현장감도 있고 사실감·생동감, 뭐 이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보는 게 아닌가 싶어요.”

-네 분이 은근한 경쟁심 같은 건 안 생기나요?
“거기서 경쟁해봤자 뭘 어쩌겠다고 경쟁을 하겠어요(웃음). 그럼 우스워지지 사람이….”

-70대의 건재를 과시하면서 실버세대에게 활력을 주고 계신 것 같아요. 예능프로 출연에 어떤 의미 부여를 하고 계신가요?
“원래 예능프로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지금껏 출연 제의도 없었고 와도 응하겠다는 마음도 없었죠. 그런데 이 프로는 예능이지만 통상 우리가 보는 것 하고는 색깔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개그맨이나 사회자가 각본대로 끌어가는 게 아니라 그저 우리 동료들끼리 모여서 같이 배낭여행을 한다는 특수 상황 만들어 풍물 보고 경험담 얘기하고 그저 생활하는 거니까.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게 새로운 것 같아서 출연하게 됐죠.”

-1년에 한 작품씩은 가급적 연극 무대에 서신다고 들었습니다. 연극에 애정을 갖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양팔로 객석을 가리키며) 객석이 이렇게 보이죠. 여기 관객이 꽉 차잖아요. 나이 차이도 있고, 성별 차이도 있지만 우리가 무대에서 벌이는 일에 다 같이 따라온단 말이죠. (무대를 가리키며) 여기서 슬프면 같이 슬퍼하고 여기서 웃으면 같이 웃고, 그 감정의 교류가 이 현장이 아니면… 다른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 때와는 전혀 다르잖아요. 극장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배우들이 희열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거 같아.”

-무대 출연진이 모두 연기파로 유명한 분들인데, 후배들과 호흡은 어떠세요?
“연기파 배우라는 말을 많이들 하지만, 그 연기파라는 게 참…배우들은 다 연기파지 뭐(웃음). 하지만 특히 열과 성을 다하는 친구들이 있죠. 온 힘을 다 여기 쏟아 놓는 배우들. 그런 사람들이 이번에 다 모인 것 같아요. 손숙씨를 비롯해 정승길·서은경·이호성 다 게으르지 않은 배우들이에요.”

-100세 시대인데 70대가 당당히 주연 맡는 작품이 많아져야 할 것 같아요. 실버세대를 위해서는 어떤 작품이 나오면 좋을까요?
“전에 어느 회사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시트콤을 기획한 적이 있어요. 이순재형, 박근형씨랑 나랑 해서 상처한 사람, 아들과 갈등관계인 사람 등이 모여 사는 이야기를 논의한 적이 있는데, 결국 성사되지 않았어요. 그런 것도 충분히 ‘꽃할배’ 이상으로 반응이 이뤄질 수 있다고 난 생각을 하거든요. 요즘 실제로 나이 든 사람 중에 의외로 건강한 사람 많아요. 우리가 젊었을 땐 환갑 지났다고 하면, 아 이제 인생 마감하실 분이다, 끝난 분이다 생각했는데 요즘엔 환갑은커녕 칠순잔치도 안 하지 않나요. 나이 들어도 건강 유지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런 작품도 나오면 좋겠지.”

-이번 작품 보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으세요. 관객분들께 한 말씀 해주시죠.
“보고 싶기만 하면 뭐해. 오셔야지. 오셔서 보셔야 되겠는데… 인터뷰도 그래서 하는 거고. 요즘 영화의 경우에는 돈도 엄청 들여서 만들고 노력도 많이 해서 천만 관객 시대다 하는데, 그렇게는 아니더라도 연극에도 애정을 가지시고 좋은 작품 찾으셔서 보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이만하면 다 됐죠? 된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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