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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과 무능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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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과거에 별로 없었던 풍경이다. 정부가 결정하고 책임져야 할 시행령 개정을 국회에 가서 일일이 협의하는 것 말이다. 24일 당정은 화학물질관리법과 화학물질 등록·평가법의 시행령 안을 조율했다. 법 통과 시점의 예상에 비해선 기업 부담을 조금 줄였다. 23일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시행령 안이 국회의 허락을 받았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 기업은 애초 공정위 안대로 하되 세부 내용은 손보는 형태다. 당정협의야 늘 있었다. 그러나 개별 시행령의 구체적 내용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협의하는 건 낯설다. 정부·여당 간 협의라지만 야당이 밖에서 압박하니 실질적으론 국회와 협의다.

 두 사안을 보며 만능과 무능 사이에서 허우적대는 정부가 안쓰러웠다. 먼저 ‘만능 정부’의 종언이다. 정부 권한인 시행령도 국회와 협의해야 할 정도로 정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줄었다. 기초연금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쥔다고 모든 걸 다 할 순 없다는 게 분명해졌다. ‘공약 파기’라고 핏대를 세우지만 반대쪽이 됐어도 달라질 건 없다.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한정된 자원, 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선 긍정적인 면이 있다. 만능은 독재와 이웃이다. 안 되는 게 없는 시대는 내 맘대로 하는 시대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다 하겠다”고 외치는 건 거짓이란 점도 분명히 알게 됐다. 그러니 매사에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하라”는 관성적 요구도 이젠 접어야 한다.

 정작 걱정은 그 다음이다. 만능 정부 관성이 탄력을 잃자 이에 익숙했던 행정부는 급격히 무능해지고 있다. 화학물질 관련법은 환경부가 2010년 말부터 업계와 기준을 논의해 온 사안이다. 그러나 의원 입법 앞에서 2년여의 협의는 싹 무시됐다. 환경부가 무능했거나 방조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시행령에서 보완해보려고 부산을 떤 게 24일 협의다. 하기야 보건복지부는 장관이 무력감을 자인하는 판이니 환경부는 양반이다.

 바뀐 상황에 맞춘 새 시스템이 작동을 안 하니 요즘 관가는 개인의 정무적 능력에 대한 의존도가 크게 높아졌다. 개인기에 의존하다 보면 위험도 함께 커진다. 특정 선수의 실수·실패도 함께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어렵게 한 골 넣었는데 바로 자책골을 먹는 식이다.

 아무리 국회 상대하기가 어렵고, 예산 만들기가 빠듯하고, 세상사가 복잡해져도 행정부가 제 몫은 해줘야 한다. 행정부는 정교한 정책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 가는 곳이다. 입법부는 체질상 정교하기 어렵고, 사법부는 태생적으로 일이 벌어져야 판단하는 후행성을 가진 곳이다. 만능이라고 기대하지 않으니, 만능이라고 우기지도 말라. 그 사이 어디쯤에서 해야 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정해 시스템을 통해 움직이자. 그러려면 목표부터 분명해야 한다. 이 정부의 핵심 목표는 뭔가. 선뜻 손에 잡히는 답이 없다. 다시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