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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왜 하필 앞치마를 두른 수퍼히어로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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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이런 상상, 해 본다. 비정규직의 삶에 지친 미스 김(KBS ‘직장의 신’) 언니가 교사자격증을 활용해 마 선생(MBC ‘여왕의 교실’)이 되었다가 학부모들의 등쌀에 학교를 떠나 가정부 ‘복녀님’으로 전직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23일 첫 방송을 시작한 SBS 월화드라마 ‘수상한 가정부’의 박복녀(최지우)는 앞서 방영된 두 드라마의 주인공과 꼭 닮아 있다. 무표정에 딱딱한 말투, 비밀스러운 과거가 그렇다. 복녀님의 뛰어난 살림 솜씨와 마술·저글링 등의 기예는 이미 미스 김 시절 검증된 바 있고, 수학 올림피아드 문제도 척척 푸는 능력은 그녀가 전직 선생님이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뒷받침한다.

SBS 월화드라마 ‘수상한 가정부’ [사진 SBS]

 세 드라마는 모두 일본 드라마의 리메이크 작이다. 일본에서 ‘여왕의 교실’은 2005년, ‘파견의 품격’(직장의 신)은 2007년, ‘가정부 미타’(수상한 가정부)는 2011년에 방영됐다. 공교육 붕괴, 비정규직 차별, 가족 해체라는 일본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역으로 신통방통한 능력을 갖춘 ‘여성 수퍼히어로’를 공통적으로 내세웠고, 성공했다. 특히 ‘가정부 미타’는 동일본 대지진 후 가족을 강조하는 분위기에 힘입어 최종회 시청률 40%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한때 ‘한국 정서에는 맞지 않는다’는 평을 들었던 이 드라마들이 최근 연이어 리메이크되었다는 건, 한국 사회 역시 비슷한 고민에 직면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하필 왜 여성 수퍼히어로일까. 이는 2000년대 초 등장한 ‘초식남(草食男)’이라는 신조어와도 연관이 있다. 어쩌다 보니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됐지만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을 보면 숨이 턱 막힌다”고 고백하는 ‘수상한 가정부’의 아빠(이성재)는 초식 동물처럼 한없이 약해진 남자를 대표한다. 험난한 세상, 이들의 등을 떠밀어 가정을 꾸리고 지켜나가려다 보니 여자들은 ‘육식화(肉食化)’한다. 여성성을 최대한 감춘 무미건조한 옷차림(흰 셔츠에 앞치마만 걸쳤는데 맵시가 나는 건 최지우니까 그렇고)에 로봇 같은 여자 주인공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여성상을 최대치까지 과장한 캐릭터다.

 할리우드산 남성 수퍼히어로들이 주로 지키는 건 위험에 빠진 지구다. 반면 일본에서 건너온 이 ‘웃지 않는 언니’들은 위기에 처한 회사를, 학교를, 그리고 가정을 구하느라 분투한다.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숨어 있는 듯하나 생각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어쩌면 정체 모를 외계 종족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일보다, 내가 딛고 선 현실을 견고하게 다져가는 것이 훨씬 어렵고 중요하니까.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