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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야구 한·일전 첫승 때 타순 읽으며 가슴 울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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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모연희(오른쪽)씨는 이화여대 재학 중이던 1960년에 여성 최초로 야구장 내 아나운서를 맡았다. 모씨와 공서영 XTM 아나운서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옛 동대문야구장 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호형 기자]

“지금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지만, 야구장이었어요. 바로 엊그제 같은데….”

 옛 이야기를 꺼내자 눈가에 고운 잔주름이 번졌다. 모연희(73)씨는 우리나라 야구경기장의 첫 여자 장내 아나운서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2학년이던 1960년부터 6년간 동대문야구장 장내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조명탑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곳을 그가 다시 찾았다. 프로야구 팬 사이에서 ‘야구 여신’으로 불리는 공서영(31) XTM 아나운서와 함께였다.

 “ 아버지(모무열 전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대행·1983년 작고)의 권유로 시작했어요. 야구도 보고 용돈도 벌 생각이었죠.”

 처음에는 공부와 아나운서를 병행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서울에 한 개뿐이었던 동대문야구장으로 모든 야구 경기가 몰리면서 학교에 못 가는 날이 부쩍 늘었다. “몇 필수 과목에서 F학점을 받았어요. 7년이나 학교에 다니다 간신히 졸업장을 받았죠.”

 ‘금녀의 구역’이었던 야구장에 등장한 첫 여성 아나운서.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반한 남성팬이 많았다. “시를 적은 편지를 건네는 분, 고생한다며 초콜릿을 건네는 팬도 있었어요. 선수들도 고백을 했는데 제가 딱 잘라 거절했죠. ” 대학 졸업 후 약사인 지금 남편을 만나 결혼한 뒤엔 장내 아나운서 일을 접었다.

  모씨는 한국이 일본을 상대로 처음 이긴 경기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1963년 9월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일본과의 1차전에서 5-2로 첫 승리를 거뒀다. 나흘 뒤 2차전에선 8회 초 김응용(현 한화 감독)의 투런 홈런에 힘입어 3-0 완승했다. 광복 후 18년 만에 일본에 거둔 첫 승리였다. “타순을 하나하나 읽는데, 제 가슴이 다 울렁거렸어요. 그때 한·일전은 지금보다 더 관심이 많았어요. 동대문구장에 관중이 2만5000명이나 들었는데 정말 발 디딜 틈도 없었죠.”

 프로야구가 한국 최고 인기 스포츠가 되면서 여성팬도 부쩍 늘었다. 경기 중계를 하는 케이블 방송사도 4개로 늘어나면서 야구 전문 아나운서도 인기 직업으로 떠올랐다. “지금은 구장마다 장내 아나운서가 따로 있어요. 저처럼 케이블방송 야구 전문 아나운서로 활동하는 이도 10명이 넘어요. 야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새벽 2시가 넘지만, 그만큼 보람도 있죠.” 공 아나운서의 말이다.

  힘들기로 치면 예전이 더했다. 60년대 동대문야구장에서는 하루 5경기가 열렸다. 장내 아나운서도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꼬박 마이크 앞을 떠나지 못할 때가 잦았다고 한다.

  오는 11월 가족과 함께 호주로 이주하는 모씨는 이번 시즌 한화의 사령탑으로 돌아온 김응용(72) 감독 얘기를 꺼냈다. “제가 아나운서를 할 때 한일은행 1루수였어요. 그때도 덩치가 크고 강타자셨죠. 다시 활동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아요.” 공 아나운서는 “선배님과 현역 선수들, 원로 야구인들을 초대해 야구 토크쇼를 했으면 좋겠다”며 모씨를 껴안았다.

글=서지영 기자
사진=이호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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