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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카레 온 더 보더' 소설가 하성란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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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하성란은 “상을 받을 때마다 부담보다 힘이 되는데, 학창시절 오락부장을 했던 대범함이 그럴 때 나오는 것 같다”며 웃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하성란(46)은 쉽게 쓰지 않는 작가다. 그의 단편은 언제나 다채로운 결이 있었고, 여러 번 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소설이, 빨리 쓰이고 읽히는 시대인가. 적어도 물질처럼 소비되는 것은 문학의 본령은 아닐 터다. 올해 황순원문학상 수상자로 하성란을 선정한 것은 그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수상작 ‘카레 온 더 보더(curry on the border)’는 소위 책장이 쑥쑥 넘어가는 ‘페이지 터너(Page Turner)’가 아니다. 위태로운 시대, 불행한 세대의 이야기를 언어와 계급의 문제와 결부시켜 풀어낸 이 작품이 우리에게 건네는 말을 몇 마디 문장으로 간추리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리저리 뜯어 보고자 하는 문학적 탐구심을 자극한다. 단언컨대 공들여 읽을수록 그 속뜻도 풍성해질 것이다.

 즐거운 수상 소식을 전하는 전화 통화에서 하 작가는 내내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문예지(실천문학)에 단편을 발표한 것이 오랜만이었고, 단행본으로 독자를 만난 것도 2010년 장편 『A』가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2009년에 현대문학상을 받고선 ‘어둠 속을 걷듯 천천히 가겠다’고 했었는데, 다른 곁가지 일을 하다 보니 열정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었어요. 새롭게 뭔가를 해보려는 찰나에 이렇게 큰 상을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저는 신인 때부터 운이 좋은 작가였어요. 그래서 상금의 5분의 1로 지인들께 밥을 사려고 합니다.“(웃음)

 그는 한 때 1년에 단편 7편을 발표할 정도로 다작을 했지만 근래에는 좀 뜸했다. 남편이 하는 출판 기획일을 도우면서 두 아이를 키우느라 늘 시간에 쫓겼다고 했다. 대신 한 작품, 한 작품에 세심하게 공을 들였다.

 “저는 단편에 수십 결이 있어야 한다고 배웠어요.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 건물처럼 복잡한 것들이 얽혀 드러나야 한다고요. 이것과 저것을 가르는 단선적인 이야기는 이 세상에 없어요. 그런 다양한 결 때문에 모호해지는 측면이 있지만 어떤 소설은 그 모호함 자체가 주제거든요. 또 그것이 제가 소설을 쓰는 재미이기도 하고요.”

 하성란에게 소설 쓰기는 ‘재미있는 놀이’다. 열여섯에 처음 습작을 시작한 이후 변하지 않는 명제였다. 갑자기 가세가 기울면서 실업계 고등학교에 들어가야 했던 작가에게 소설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기도 했다. 고 1때 학내 창작대회에서 2등을 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당시 심사평이 “황순원의 ‘소나기’와 비슷하지만, 앞으로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였다.

 “소설에 소년과 소녀가 나오거든요. 초등학교 5학년 때 황순원 선생의 작품을 읽었는데,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소나기’는 지금의 제 작품과 질감이 다르지만, 선생님의 장편 중에는 신랄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거든요. 문학과지성사에서 잠시 근무할 때 선생님이 출판사로 전화를 하셔서 통화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 ‘팬’이라고 고백했었죠.”

 하 작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든다.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였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가 문학공부를 시작한 것은 스물넷이 돼서였다.

 이번 수상작 ‘카레 온 더 보더’에도 스무 살에 갑자기 사회에 내던져진 ‘영은’이 나온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노인 다섯을 봉양하는 영은이의 삶은 죽음과 가난이 곰팡이처럼 드리운 삶이다.

 “20대는 뭔가 불안한 시절이죠. 저도 늘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데’라고 느꼈어요. 그래도 저희 때는 확실한 미래가 보였어요. 요즘 20대는 그마저도 안 보이는 것 같아요. ‘카레 온 더 보더’는 간단이 말하면 신분 상승을 꿈꾸지만, 그것이 애초에 차단된 이들의 이야기예요.”

 작가는 요즘 들어 삶을 ‘몸’으로 부대끼며 사는 젊은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문학이 미적인 것만을 추구하기에 지금 사회는 너무 위태롭지 않나요. 제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인 문제를 등한시 하지 않으려고요. 그것을 어떻게 소설 속에 녹여낼 것인가 하는 게 요즘 제 최대 고민입니다.”

 ‘카레 온 더 보더’의 클라이막스는 영은이가 허름한 빌라에서 노인들에게 카레를 만들어 주는 장면이다. 어둠 속에서 영은이의 손길만 기다리는 10개의 눈빛, 카레향으로도 덮을 수 없는 죽음의 냄새는 이 소설의 압권이다. 그것은 제목인 ‘카레 온더 보더’도 가로막을 수 없는 가난과 죽음의 장막이다. 어느덧 중년이 된 작가에게 죽음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안 그랬는데, 가까운 친구를 잃으면서 이제는 죽음이 발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고 느껴요. 저는 지금 늦여름을 지나고 초가을의 문턱에 서 있는 거잖아요. 삶에서 양팔을 딱 뻗치고 있는 건데, 그래서 좋은 소설을 쓰려면 ‘딱 이때구나’ 싶어요.”

 등단 3년 만에 동인문학상을 수상하고, 발표하는 작품마다 평단과 독자의 편애를 받았던 이 작가는 아직도 자신이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리고 소설을 가장 잘 쓸 수 있는, 이 시기를 놓치지 않겠다고 했다.

‘카레 온 더 보더’의 주요 장면

“불광동 지하 방에는 해가 들지 않았다. 그 방에는 주야장천 늘 짙은 어둠이 고여 있었다. 지하 방은 지상에서 고작 열 계단 아래였다. 그런데도 그녀가 상상할 수 없는 어둠이 펼쳐졌다. (…)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녀는 어둠에 짓눌렸다. 건장한 남자 같았다. 숨이 막혔다. 북쪽 벽에는 검은 곰팡이들이 피어 있었다. 발이 그쪽에 닿을라치면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발을 떼곤 했다.”

-곰팡이가 마치 ‘죽음’처럼 드리운 스물두 살 ‘그녀’의 지하방 풍경.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그녀는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날림 공사로 만든 계단에서 몇 번이나 구를 뻔했지만 용케 중심을 잡았다. 에어로빅으로 다져진 운동신경 때문이었다. 일 층까지 왔지만 커다란 손이 나와 그녀에게 검은 그물을 드리울 것만 같았다. 안방 문 뒤에선 대체 어떤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일까. 나이든 노인들이 엇비슷한 차림으로 앉아 종일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것 같았다. 오징어를 말리는 듯한 그 냄새는 늙음과 죽음 그리고 가난의 냄새일지도 모른다. 진한 카레 향으로도 가릴 수 없는 냄새. 그것이 너무 공포스러워서 영은이는 늘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인 다섯을 봉양하는 영은이의 허름한 빌라를 도망치듯 나서는 ‘그녀’

 “김은 곧 이곳을 떠나 그 연구소로 옮기게 될 것이다. 함박스테이크가 햄버거 스테이크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는 모든 단어들을 순화시키느라 남은 생을 바칠 것이다. 그녀가 가끔 혼자 중얼거리고 숨통이 트이는 그 단어들을 바꾸려 들 것이다. 식모가 가정부로 차장이 안내양으로 바뀌는 순간 사라졌던 어떤 것들이 떠올랐다. 누군가 말했다. 한 개인의 사회적 자아는 그 개인의 언어에 깊은 자국을 낸다고. 똑똑한 김이 모를 리 없었다.”

-대학 선배인 ‘김’ 때문에 언어순화 연구원 자리에서 밀려난 ‘그녀’가 언어와 계급의 관계를 생각하며.

글=김효은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하성란=1967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소설집 『루빈의 술잔』 『옆집 여자』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웨하스』. 장편 『식사의 즐거움』 『삿뽀로 여인숙』 『내 영화의 주인공』 『A』. 동인문학상·한국일보문학상·이수문학상·오영수문학상·현대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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