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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불교 발달로 책 수요 폭발 … 宋도 고려 서적 부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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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호 26면

금속활자로 인쇄된 서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고려 말기의 승려 백운화상이 상하 두 권으로 펴냈다. 상권은 전하지 않고 하권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고려왕조의 인쇄술은 당대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에 이른 명품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인물은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의 한 사람인 최이[崔怡·?∼1249년, 첫 이름은 우(瑀)]다. 그는 최씨 무신정권을 세운 최충헌(崔忠獻·1149∼1219년)의 아들로 국왕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들 만큼 절대 권력자였다. 고려 인쇄술을 언급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최초로 금속활자로 만든 『상정고금예문(詳正古今禮文)』의 편찬을 주도했다. 이규보(1168∼1241년)는 그의 입을 빌려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고려사의 재발견 명품 열전 ⑦ 금속활자

“인종 때(1122~1146년) 편찬한 『상정예문』(50권)은 오래되어 빠진 글자가 많아 참고하기가 어려웠다. 나의 아버지(최충헌)께서 다시 보완해 2부를 만들었다. 한 부는 예관(禮官)에게 보내고 또 한 부는 우리 집에 보관했다. 강화도 천도 때 예관이 한 부를 미처 갖고 오지 못했다. 우리 집에 보관된 한 부가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선친의 선견지명을 깨달아 활자로 28부를 인쇄하여 여러 관청에 보관하게 했다.”(『동국이상국집』 후집 권11 「신서상정예문발미(新序詳定禮文跋尾)」 진양공(晉陽公·최이)을 대신해 짓다)

1232년(고종19) 강화도 천도 후 최이 주도 아래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 28부를 인쇄했다는 기록이다. 최이는 1234년 진양후로 책봉됐고 이규보는 1241년 숨졌다. 이를 볼 때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1234년에서 1241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분묘에서 출토된 금속활자. [국립청주박물관]

몽골 침입기에 금속활자로 책 제작
최이가 직접 쓴 다음 글에 따르면 1239년(고종26) 당시 『상정고금예문』 외에 또 다른 책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사실이 드러난다.

“『남명증도가(南明證道歌)』는 선문(禪門)에서 중요한 책이다. 참선을 하는 후학들은 이 책을 통해 오묘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를 없애고 전하지 않게 할 수 없다. 이에 기술자를 모아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鑄字本)을 거듭 새겨 길이 전하고자 한다(重彫鑄字本 以壽其傳焉). 기해년(己亥年:1239) 9월 상순 중서령 진양공 최이가 삼가 쓰다.”

책의 정확한 이름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이다. 본문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을 거듭 새겼다(重彫鑄字本)”라고 한 것은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鑄字本)을 그대로 뒤집어 목판에 다시 새겼다는 뜻이다. 금속활자본을 다시 목판본으로 인쇄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이 책은 현재 목판본으로 전해진다. 1239년은 고려 왕조가 강화도에 천도한 지 7년이 지난 시점이다. 천도 직후의 어수선한 상황을 감안하면 금속활자 제작과 인쇄는 천도 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주목할 만한 기록이다.

현재 전해지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377년(우왕3)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간행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인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하권만 보관돼 있다. 그렇더라도 1440년대 독일에서 구텐베르크가 처음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때보다 무려 70년가량 앞선다. 고려왕조는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낸 세계 최초의 왕조였다.

활판(금속) 인쇄의 시초는 중국 송나라 인종 때(1041∼1048년 무렵) 필승(畢昇)이란 사람이 ‘교니(膠泥·찰기 있는 점토)’를 이용해 활자를 만든 뒤 불에 구워 활자판에 배열한 것이다. 그러나 흙이 쉽게 부스러지는 등 내구성이 약해 실용화에 실패했다. 중국은 명나라 홍치(弘治)·정덕(正德) 연간 때(1488~1521년) 비로소 금속활자를 완성한다. 청주 흥덕사의 『직지심체요절』보다 거의 100년이나 늦다.

금속활자는 한번 만들어 놓으면 필요할 때 활자를 집어내 판을 짜 손쉽게 책을 찍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활자를 금속으로 만드는 주조(鑄造)기술, 활자가 흐트러지지 않게 판을 짜는 조판(組版)기술, 금속에 잘 묻는 먹 제조 기술 등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천혜봉, 「세계 초유의 창안인 고려주자(鑄字)인쇄」, 1984). 이런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실용화는 어려웠다. 그런데 고려는 중국에서 금속활자를 만들기 전에 흥덕사라는 지방 사찰에서도 금속활자로 책을 찍을 정도로 실용화에 성공했다.

통일신라시대 목판인쇄술이 밑거름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단순히 조상의 뛰어난 지혜 덕분으로 돌리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당시 고려의 지식과 기술 수준이란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이 온당하다.

우선 기술 차원에서 통일신라 시대부터 인쇄문화 기술이 꾸준히 축적돼 왔다. 나무에 글자를 새겨 책을 찍어내는 목판인쇄술은 중국 당나라 현종 때(712∼756년) 시작됐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은 751년(신라 경덕왕 10)에 제작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多羅尼經)』(국보 126호)이다. 통일신라 때 목판인쇄술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증거다. 고려 역시 목판인쇄술로 초조대장경(1011년)과 재조대장경(1236년)을 완성했다. 당시까지 전래된 모든 불교 경전을 모아 목판인쇄로 조판한 거창한 사업이었다. 이를 계기로 인쇄술이 크게 발달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와 금속활자로 만든 문화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목판인쇄를 하기 위해선 나무의 결을 삭히고 쪄서 진을 빼고 살충한 다음 충분히 말려 판이 뒤틀리거나 깨어지지 않게 처리해야 한다. 새기려는 책의 본문을 반듯한 글씨로 필사해 판목 위에 뒤집어 붙인 뒤 각수(刻手·돌이나 나무에 조각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가 새겨야 한다. 이는 오랜 시일이 걸리고 경비가 많이 드는 단점이 있다. 여러 부를 찍어 낼 수 있지만 한 책을 인쇄하는 것으로 목판인쇄의 수명은 다한다. 이러한 단점을 기술적으로 보완하려는 노력 속에서 금속활자가 창안된 것이다. 고려왕조가 강화도에 천도한 뒤 금속활자로 책을 출간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재조대장경을 조판할 정도로 인쇄기술이 발달됐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지식의 차원에서 보면 고려인들의 왕성한 지식욕이 금속활자가 창안된 또 하나의 원인이다. 정도전의 글이 그런 사정을 잘 알려준다.

“무릇 선비로서 학문의 길로 향할 마음이 있으나 서적을 얻지 못하면 또한 어찌하겠는가? 우리나라는 서적이 많지 않아 배우는 자가 책을 폭넓게 읽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 나 역시 이를 오래전부터 걱정해왔다. 그래서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하고 활자를 주조해 경·사·자·서(經史子書)와 제가(諸家)의 시문부터 의학·병서·법률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서적을 인쇄해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이 이를 모두 얻어 독서해 공부하는 때를 놓쳐 한탄하는 일이 없도록 했으면 한다.”(『삼봉집』 권1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

정도전은 지식의 확산을 위해 금속활자를 만들고 각종 서적을 인쇄해 학자들에게 널리 보급하자고 했다. 금속활자가 창안된 배경에는 고려인의 강한 지적 욕구가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과거 응시자에게 오류 없는 책 공급
고려는 건국 초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전국에 많은 학교를 세웠다. 그에 따라 많은 지속적인 서적의 제작과 유통이 절실했다. 인쇄술이 발달될 토양이 충분했던 것이다.

“서경유수가 보고했다. ‘서경에서 과거 응시자들이 공부하는 서적은 손으로 많이 베껴 틀린 글자가 많습니다. 비서각에 소장한 『구경(九經)』 『한서(漢書)』 『진서(晋書)』 『당서(唐書)』 『논어』 『효경』 등의 역사서와 경전, 여러 문집, 의(醫)·복(卜)·지리(地理)·율(律)·산(算) 등에 관한 서적을 나누어 주어 여러 학교에 두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왕은 관리들에게 각각 1부씩 인쇄해 보내도록 했다.”(『고려사』 권7 문종 10년(1056) 8월)

고려왕조가 많은 서적을 인쇄한 이유는 과거 응시자에게 오류가 없는 책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개경은 물론 경주·충주·청주·성주·진주·남원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책을 발간했다. 무신정권 때 명종은 유신들에게 『자치통감』의 교정을 보게 한 뒤 여러 군현에서 분담하여 출간하게 했다.(『고려사』 권20 명종 22년(1192) 4월) 고려 때 지방에서 서적을 인쇄했다는 사실은 당시 지식층의 저변이 그만큼 넓었다는 증거다.

불교의 융성에 힘입어 불교경전 수집과 출간이 활발했던 점도 고려의 인쇄술을 발달시킨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

“대각국사 의천은 불법을 구하기 위해 선종 2년(1085) 4월 몰래 제자 2인과 함께 송나라 상인의 배를 타고 송나라에 갔다. … 왕이 송나라에 의천의 귀국을 요청하자 귀국한 의천은 불교와 유교 서적 1000권을 가져왔다.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어 거란과 송나라에서 사온 4000권의 책을 모두 간행했다.”(『고려사』 권90 대각국사 의천 열전)

의천이 당시 4000권의 책을 간행했다는 기록이다. 고려는 유교와 불교의 발달로 많은 서적이 필요해 인쇄술을 장려하게 된 것이다. 고려에서 인쇄술이 발달돼 많은 서적이 출간된 사실을 중국도 알고 있었다. 송나라 황제는 고려 사신에게 127종의 책 목록을 주어 구하려 했다(『고려사』 권10 선종 8년(1091) 6월).

책은 지식을 생산·공급해 인류문명을 발달시키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인쇄기술이 발달하지 않으면 책을 제대로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고려 때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른 인쇄술이 그 뒤 더 이상 기술적인 진보를 이루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한자와 한문이 가진 한계 때문이다. 서양의 알파벳은 숫자가 적고 글자 구조도 단순한 데 비해 한자는 글자 구조가 복잡한 데다 수천 자를 일일이 주조해야 해 기술상의 어려움이 컸다. 대중이 쉽게 이해하고 쓸 수 없는 난해한 한자와 한문은 결국 지식과 기술의 발전을 지체시켰다. 인쇄술 역시 대중이 아니라 지식인 계층인 사대부를 위한 제한적인 기술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근대 이후 지식과 기술의 주도권이 서구로 넘어간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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