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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주제 바꿔도 김 대표 다시 사과 요구 … 겉돈 90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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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야 3자회담이 열린 국회 사랑재 현판. `국민을 사랑하라`는 뜻이 담겼다. [김경빈 기자]

16일 오후 5시 3자회담을 마치고 국회 사랑재를 걸어 나오는 박근혜 대통령은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를 주로 바라봤다. 옆에 있던 민주당 김한길 대표의 표정은 어두웠다. 박 대통령을 배웅하고 민주당 인사들을 접한 김 대표는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고 한다. 예정시간에서 30분을 넘기며 1시간30분간 진행된 국회 3자회담은 합의문도 없었고, 회담 내용에 대한 발표조차 여야가 따로 했다. 민주당 내 강경파 의원들에게선 “이럴 거면 회담을 왜 했느냐”는 얘기가 튀어나왔다. 한 당직자는 “회담 후 상황은 더욱 악화됐고 불통만 드러났다는 점에서 역대 최악의 회담인 것 같다”고도 했다.

그래서 김 대표의 ‘창’과 박 대통령의 ‘방패’가 한 시간 반 내내 충돌하며 정국 정상화는 더욱 멀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날 박 대통령은 지난 5월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입었던 회색 바지 정장 차림이었다. 박 대통령의 복장을 놓곤 당시 “의회의 권위에 대한 존중의 의미를 담고 있다(간호섭 홍익대 교수)”는 평가가 나왔었다. 김 대표는 수염은 깎지 않았지만 노숙 차림을 벗고 정장에 넥타이로 예의를 갖췄다.

 그러나 회담 직후 국회의 민주당 의총장에 나타난 김 대표는 정장 상의를 벗어 던지고 넥타이를 풀어 던졌다. 직전 그는 당 지도부에 “나는 7가지나 얘기를 했는데 박 대통령은 하나도 답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회담은 출발부터 엇갈렸다. 민주당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김 대표가 밝힌 ‘7가지 요구안’의 순서에 맞춘 게 아니라 박 대통령이 준비한 순서에 맞춰 답했다고 한다. 민주당 관계자는 “김 대표는 경제민주화와 복지 문제를 첫 요구사항으로 물었는데 박 대통령은 세법 문제부터 답했다”고 전했다. 다른 관계자는 “회담 내내 박 대통령은 표정이 없었다. 대통령은 본인이 준비해 온 순서대로 그대로 얘기했다”고 전했다.

 결국 대통령의 사과 문제를 놓고 박 대통령과 김 대표가 충돌했다. 김 대표가 모두발언에서 미리 준비해 간 A4용지를 꺼내 국정원 대선 개입 등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면서다. 한 시간가량을 이 문제를 놓고 신경전을 펼쳤다. 김 대표는 지난해 대선 TV토론에서 박 대통령이 국정원 여직원 댓글이 없었다는 취지로 밝혔다는 주장을 하며 “무언가 말씀이 있어야 한다”고 압박했지만 박 대통령은 침묵했다고 한다. 민주당 관계자는 “이때 박 대통령은 수초가량 쉰 뒤 다른 의제로 화제를 넘겼다”고 전했다. 김 대표도 이에 지지 않고 다시 사과 문제를 꺼내들어 집요하게 답을 요구했지만 박 대통령은 결국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회담 후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민주당의 사과 요구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회담을 결렬시키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말은 대선 불복이 아니라는데 어떻게 그런 주장을 믿겠는가”라고도 했다.

 국정원 개혁을 놓고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박 대통령과 김 대표가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국정원 자체 개혁’을 강조할 것에 대비해 김 대표가 회담 현장에서 내민 ‘히든 카드’는 2003년 한나라당 국정원개혁추진단이 만든 국정원 개혁안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국정원 예산 통제의 강화 등 현재 민주당의 주장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김 대표의 역공에도 국정원 자체 개혁과 이를 통한 국회의 논의를 고수했다.

 회담 후 열린 민주당 의총장에서 김 대표의 노웅래 비서실장이 채동욱 검찰총장과 관련해 “진상조사가 끝날 때까지 사표 처리를 않겠다”고 박 대통령이 밝혔다고 전하는 대목에선 ‘아’ 하는 반응이 흘러나왔다. 직후 민주당의 한 486 의원은 “시대가 주전파를 부르고 있다”고 했다.

  회담은 마무리 발언도 없이 끝났다. 박 대통령이 “이제 시간이 됐나요”라는 취지로 물으며 마무리 모양새도 없이 그냥 종료됐다는 게 민주당의 주장이다. 김 대표는 “회담 마지막에 가선 더 얘기할 말이 없었다”고 했다.

 합의문을 내지 못하고 회담을 끝낸 뒤 청와대와 야당은 서로를 공격했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박 대통령이 의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야당이 당내 사정으로 제기한 무리한 요구를 안 들어줬다고 응석을 부린다. 무책임한 정당”이라고 공격했다. 반면 김 대표는 “많은 얘기가 오갔지만 정답은 하나도 없었다. 담판을 통해 민주주의의 회복을 기대하는 건 무망하다는 게 결론”이라고 했다.

 여야 간에도 공방이 이어졌다. 회담 후 황 대표와 김 대표는 따로 사랑재에 남아 발표 방식을 논의했지만 결국 ‘각자 발표’로 나섰다. 김 대표는 의총장에서 “할 말은 다 했다”고 했지만 새누리당 황 대표의 여상규 비서실장은 “박 대통령이 ‘최고사정기관인 검찰총장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면 야당이 먼저 나서서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원칙이고 도리 아니냐’고 밝혔을 때 김 대표는 이렇다 할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글=채병건·강태화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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