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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출판 외길 양철우 회장의 '보름 악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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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양철우 회장

교학사의 양철우(88) 회장은 최근 보름간이 지옥 같았다. 지난달 30일 검정 통과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가 ‘우편향 논쟁’의 중심에 놓였기 때문이다. 아들 양진오(49) 대표는 살해 협박 전화까지 받기도 했다. 양 회장은 노구를 이끌고 교과서 집필진을 만나며 동분서주했다.

 특히 지난 이틀간 고민이 컸다. 교과서 출간이냐 포기냐의 기로에서 결국 ‘출간’을 선택했다. 양 회장이 15일 그간의 마음고생에 대해 입을 뗐다. 그는 “교과서는 저자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사상, 그리고 교수법이 담기는 거다. 이에 대한 논쟁은 저자의 몫이다. 출판사는 원고를 책으로 인쇄하고 이를 보급하는 역할을 맡는 거다”라며 출판사가 이데올로기 논란의 대상이 된 현실에 큰 아쉬움을 표했다.

 ◆출판이냐 포기냐=13일 서울 마포 교학사 사옥에서 양 회장, 양진오 대표 등 경영진과 이명희 교수 등 한국사 교과서 대표 필진이 만났다. 당시만 해도 교학사는 ‘출판 포기’를 고려했다. 저자들에게 경영상의 이유로 출판 포기의 뜻을 타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들은 “교학사에서 포기한다면 출간이 어려워진다. 다른 출판사에서 내려고 해도 다들 부담을 느낄 거다”라며 출판 강행의 뜻을 분명히 했다.

 일반 참고서의 경우 계약서상 출판사가 ‘갑’이고 저자는 ‘을’이다. 출판사가 주도권을 갖는다. 그런데 교과서는 거꾸로다. 저자가 ‘갑’이고 출판사는 ‘을’이다. 다시 말해 저작권 문제로 법적 소송이 붙을 경우 출판사가 여러모로 불리해진다.

 고민 끝에 교학사는 15일 교과서를 내는 쪽으로 최종 입장을 정했다. 교육부의 기본 방침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곧 공식 발표도 할 예정이다. 양 회장은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우리 사회의 편협한 지적 풍토를 아쉬워했다. “세계는 저만치 가고 있는데 혹여 우리만 해묵은 이데올로기 논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라고 했다.

 ◆"사회 지적으로 성숙해졌으면”=양 회장은 ‘출판계의 산증인’이다. 63년째 출판 일을 해오고 있다. 그는 해방이 되자 충남 강경상고를 졸업했다. 그리고 작은 출판사에서 일을 배웠다. 양 회장은 “당시에는 문맹률도 아주 높았다. 출판물을 내는 것만으로 문맹 퇴치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읽을거리’가 귀한 시절이었다.

 그러다 서울 소공동에 있는 상공회의소 사무실을 빌렸다. 거기서 초등학생 수련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은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했다. 그는 미처 피란을 가지 못했다. 신공덕동의 지하에 숨어서 지냈다. 석 달간 숨어 지냈다. 전황이 달라졌다. 국군이 서울을 수복했다. 중공군이 참전했고 1·4 후퇴 때 대구로 피란을 갔다. 거기서 ‘대입 종합수학 완성’이란 책을 찍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도 인쇄했다. 그의 출판 사업은 가슴 아픈 현대사 속에서 싹이 텄다. 이후 초등학교 ‘표준전과’, 중학교 ‘필승 시리즈’, 고교 ‘파우어 시리즈’ 등의 대표작을 펴냈다. 지난 20년간 100억원을 들인 ‘한국사대사전’도 지난 5월 출간했다.

 ‘교학사’라는 이름은 『예기(禮記)』의 ‘교학상장(敎學相長)’에서 따왔다. 양 회장은 “‘스승은 학생에게 가르치면서 성장하고 제자는 배움으로써 진보한다’는 뜻이다. 결국 가르치는 이도 성장하고 배우는 이도 성장한다. 서로가 상대를 성장케 한다는 의미다”라고 설명했다.

 교학사는 경영난을 겪고 있다. 주요 사업인 참고서 등이 EBS 강의와 인터넷 강의에 밀리면서 실적이 악화됐다. 그나마 교과서 시장이 버티고 있다. 교과서는 현재 교학사 전체 매출의 반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크다. 지난 7월 재무구조 악화로 인해 워크아웃 기업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역사 교과서 출간 포기를 한때 검토한 것도 이번 검정으로 다른 과목 교과서 48종의 판매에 악영향을 미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채권단에서도 같은 이유로 출간을 우려했다.

 양 회장이 마지막 부탁을 했다. “나의 출판 철학은 국민 계몽과 지식 함양이었다. 60년 넘게 출판계에 있으면서 돈보다 그걸 중요시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지적으로 보다 성숙해졌으면 한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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