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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11살 소년 인권도 못 지키는 사회가 윤리를 논할 자격이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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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대학 시절 노트들을 죄 끌어내 들춰보았다. 고난도 문제 해결의 단서를 찾기 위해서. 찾고 싶었던 건 도덕적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경우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었다. 배웠던 기억은 나는데 정확한 표현이 헷갈렸다. 그러나 찾지는 못했다. 버리는 걸 정리로 아는 터이니 어쩌면 그 노트가 남아있는 게 용한지도 모른다. 할 수 없이 상식만으로 고난도 문제에 도전한다.

 문제는 ‘채동욱 검찰총장 사퇴까지 과정에 나타난 가치들의 충돌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다. 사건 개요는 이렇다. 한 언론사가 채 총장에게 11살짜리 혼외 아들이 있다고 보도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지목된 아이의 친구들과 그들의 부모 그리고 학교 등을 취재해 각종 정황증거들을 들이댔다. 채 총장은 이에 정정보도 청구와 유전자 검사 의사를 밝혔다. 지루한 진실 공방이 벌어질 참이었다. 이 순간 법무부 장관이 공개감찰을 지시했고, 채 총장은 즉각 사퇴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곧바로 ‘공인의 윤리 문제냐’ ‘검찰 독립성 훼손이냐’를 놓고 치열한 공방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갈래의 가치들이 충돌했다. 제기된 문제들만 추려도 검찰총장이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자식을 부정하는 패륜을 저지르는 것인지의 문제, 정권에 껄끄러운 검찰총장을 모함해 쫓아내고 검찰을 길들이기 위한 것인지의 문제 등 간단치 않다. 이들 문제는 어쨌든 진실을 규명하겠다고 했으니 일단 지켜보면 될 거다.

 한데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 사회는 어떤 가치판단 기준을 들이대도 앞의 모든 문제를 뛰어넘는 ‘최상위 가치’ 하나를 파괴했다. ‘자라는 모든 어린이의 인권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 소위 ‘합법적’ 자녀가 아닌 혼외로 태어난 아이라도 어린이의 인권을 유린하는 시도는 절대 해선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런 일은 거리낌없이 저질러졌다. 어쩌면 아버지일지도 아닐지도 모르는 사람의 비위를 증명하기 위해 소년의 출생이 까발려졌다. 그의 엄마는 아이의 출생과 관련해 구구한 변명을 해야 했고, 이로써 그 아이는 의문투성이로 만천하에 공개됐다. 그런가 하면 한 언론 매체는 그의 어린 친구들까지 끌어내 ‘친구 출생의 비밀’을 폭로하도록 만들었다. 그 아이들의 정서적 상처와 혼란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게 정상적인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권력가 주변의 정쟁이야 늘 있는 일이다. 하나 청와대는 이번 사안에 대해 공직 윤리의 문제일 뿐 정쟁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 말을 믿으려고 한다. 만일 어린이의 인권을 유린해서라도 정쟁에서 이기려 했다면, 그건 국민들이 용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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