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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세력화된 반체제 정서와 민주공동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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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지루했던 여름을 넘기고 추석을 맞게 되니 우리 사회도 이쯤에서 평상을 되찾아야겠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 터진 후 모두가 착잡한 마음으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도 아니며 이미 많은 반응이 쏟아져 나왔으니 이제 좀 더 긴 안목으로 나라와 공동체의 앞날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

 어느 나라에서든 반체제 정서와 이를 바탕으로 한 반체제 세력은 존재하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반체제 세력이 국가체제의 기본적 정통성과 헌법질서를 수용하고 새로운 방향으로의 개혁을 합법적으로 추구하는 세력인가, 아니면 국가체제와 헌법질서의 정통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이를 물리적으로 대치하겠다는 혁명세력인가 하는 차이다. 개혁세력이냐 혁명세력이냐에 따라 대처방법이 현격히 달라져야 하는 것이 정통성을 지켜가는 민주국가의 모습이다.

 선진민주체제일수록 합법적 경쟁절차를 무시하고 공작적·물리적 혁명에 의해 국가권력을 독점하려는 세력에 대하여는 민주공동체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고 예방 및 형벌적인 차원에서 만반의 조치가 제도화돼 있다. 극단적 반체제 정서나 세력이 종교적 맹신과 같은 병리적 현상으로 둔갑하는 사례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선, 민주공동체가 그러한 자구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는가. 다른 한편, 자유로운 경쟁체제의 제도화에 의해 반체제 정서의 출구와 개혁세력의 참여를 확실히 보장하기에 민주정치의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파란만장한 한국현대사의 전개과정은 수많은 사연을 남겨놓았고 더불어 반체제 정서와 세력이 양산될 수 있는 토양을 갖게 된 것이 사실이다. 조선조의 전근대적 봉건제도의 유산으로 남은 갈등요인들은 차치하고 일제의 식민통치는 독립운동과 반제국주의운동이란 범국민적 저항의식을 뿌리내리게 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좌파이념과 자유민주주의라는 우파사상의 대결로 나타난 이데올로기시대의 갈등과 뒤섞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념과 사상에 입각한 정치활동의 명분이 행동의 적극성을 고조시켰다. 해방과 분단에 이은 미군정 아래서의 정치적 혼란, 그리고 남북에서의 개별 정부 수립은 결국 6·25전쟁으로 이어졌고 그 어려웠던 과정에서 무수한 희생자가 양산됐으며 반체제 정서도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부터 추진된 권위주의체제의 근대화 노력은 산업화에 성공하면서도 민주화의 깃발 아래 확산된 반체제운동에 밀려 87년 민주화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우리들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다. 다만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확연히 인식되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면 첫째, 87년 민주화 항쟁과 성공은 대한민국의 민주헌정을 회복하려는 개혁의 노력으로 국가체제에 대한 혁명의 시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둘째, 87년 민주화 성공의 흥분 속에서 대한민국은 앞으로 87년 체제에 대한 혁명적 변화를 기도하는 반체제 세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별다른 생각이나 논의가 없었다는 것이다.

 2008년에 시작된 세계적 금융대란과 경제 불황은 한국에서도 고용, 복지 등 민생경제의 악화와 빈부격차의 심화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불신이란 이념적 흐름과 어울리면서 반체제 활동의 새 탄력을 제공하였다. 더욱이 핵무기 위협을 앞세운 북한의 강수는 국민들에게 전쟁 가능성을 심각하게 의식시켰다. 그런 가운데서 터진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은 과연 대한민국의 안보와 민주정치의 건전성은 확실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적절한 시점에 결코 피해서는 안 될 과제가 우리 민주공동체에 주어진 것이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불거진 한국정치의 병리적 현상에 대처할 교과서적 정답은 간단명료하다. 민주국가체제에 도전하는 혁명적 반체제 불법활동은 엄격한 법의 집행으로 대처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법의 권위와 정당성은 모든 국민의 기본권이 공정하고 평등하게 보호돼야만 확립될 수 있다. 그동안 국민은 현명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역대 집권세력이 국가정보기관의 정치 불개입 원칙을 철저히 지켜가는 데 적지 않은 허점을 보여 왔다는 것을, 그리고 정치권의 야당으로부터는 혁명적 반체제 세력에 대한 결연한 척결의지를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결국 87년 민주화 체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작업은 대한민국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지체할 수 없는 과제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