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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미·러, 1400명만 보고 10만 명엔 눈감아 … 알아사드 "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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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14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리아의 화학무기 처리와 관련한 합의를 발표하면서 “러시아 측에 감사한다”는 말을 네 차례나 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함께 연 기자회견에서다. 케리 장관의 이런 모습은 합의안의 과거와 미래 운명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번 합의는 지난 9일 러시아의 중재로 시작됐다. 이 무렵 미국 의회에선 군사작전 승인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늘어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겐 탈출구가 필요했었다. 그 탈출구를 러시아가 만들었다. 합의안의 미래 역시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부와 가까운 러시아의 사후 협조에 달려 있다. 시리아 사태와 관련해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 등에서 그동안 미국의 발목을 잡아 왔다. 케리 장관의 “감사”가 과거형인 동시에 미래형인 이유다.

 2박3일의 협상 과정에서 탄생한 4장 분량의 합의서는 꽤 구체적이다. 화학무기 폐기 수순이 담겼다. 우선 알아사드 정부는 일주일 내에 화학무기 보유 현황을 완전히 공개해야 한다. 이어 11월까지 국제사찰단을 입국시켜야 하며, 내년 상반기까지 모든 화학무기를 없애야 한다. 방식은 국제사찰단이 화학무기가 있는 지역을 확인하면 화학무기금지기구(OPCW)와 유엔에서 요원을 급파해 통제하고 폐기하는 절차를 밟는다.

 시리아 정부가 합의된 내용을 어길 경우 유엔 안보리가 결의안으로 제재하기로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화학무기 해체를 거부하면 ‘평화 파괴행위에 대해 군사제재를 가할 수 있다’는 유엔헌장 7장도 적용하기로 했다. 케리 장관은 “이번 합의가 시리아에서 화학무기를 완전히 종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합의 소식이 전해진 뒤 오바마 대통령은 “시리아의 화학무기를 없애기 위한 구체적인 진전을 담았다”고 환영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외교가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서도 준비태세를 계속 유지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합의한 대로 실행이 뒤따를지 여부다. 미국과 러시아는 그동안 시리아가 보유한 화학무기 규모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해 왔다. 1000t이라는 미국에 맞서 러시아는 그보다 더 적다고 강변했다. 화학무기 사용 주체를 놓고도 알아사드 정부를 지목한 미국과 달리 러시아는 반군 측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앞으로 국제사찰단의 활동 과정에서 마찰을 빚을 가능성은 그만큼 크다.

 무엇보다 합의안은 1400명(미 정부 집계)의 희생자를 낸 화학무기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지금까지 10만여 명이 희생당한 시리아 사태의 근본 해법에 대해선 외면했다. 미 공화당의 존 매케인(애리조나), 린지 그레이엄(사우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이 공동성명을 내고 “이번 합의로 알아사드 정권은 충분한 시간을 벌게 됐고, 러시아와 시리아 정부가 주도권을 쥐게 됐다”고 비판한 이유다. 반군에 대한 무기 지원과 알아사드 정권에 대한 군사적 응징을 주장해 온 이들은 “나약한 미국을 보여 준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알리 하이다르 시리아 국민화해부 장관은 15일 미국과 러시아의 시리아 화학무기 폐기안 합의를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이다르 장관은 이날 러시아 리아노보스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과 러시아의 화학무기 해법 합의로 시리아가 위기를 탈피했고 한편으로는 (서방 사회가) 시리아와의 전쟁을 피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는 러시아와 같은 국가를 친구로 두었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시리아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시리아 시민군 "정부군, 화학무기 옮겼다”=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에 대한 미국의 응징을 기다려 온 시리아 반군은 미·러의 합의에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자유시리아군을 이끄는 셀림 이드리스 사령관은 14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시리아국민연합(SNC) 총회에 참석해 “(시리아의 화학무기를 내년 중순까지 폐기하기로 한) 합의안에 결사 반대한다”면서 “국제사회에 실망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반군 측은 정부군이 며칠 전부터 화학무기를 레바논과 이라크 등으로 옮기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내놨다. 미국의 공습이 물 건너감으로써 반군 내 알카에다 연계 세력과 지하디스트 등 극단주의자들이 득세할 수 있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실제로 14일 반군 내 알카에다 연계 무장세력과 온건파 주류 그룹이 이라크 접경 지역에서 무력 충돌해 5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영국에 있는 시리아인권관측소(SOHR)가 밝혔다. 충돌 원인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최근 반군 내에서 고조되고 있는 강경-온건 노선 갈등이 배경이 된 것으로 AP통신이 전했다.

 이날 SNC 총회에선 온건파 이슬람주의자 아흐마드 토아메흐(48)가 임시 총리로 뽑혔다. 토아메흐는 반군이 점유한 북부 지대를 중심으로 “과도정부의 안정화를 꾀하겠다”고 말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은 토아메흐 과도정부에 매월 2억 달러의 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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