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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김염(金焰)과 풍운의 상하이

중앙일보

입력

마도(魔都) 상하이

20세기 초 상하이는 격동의 국제도시였다. 동양의 파리( Paris of the East) 라고도 하고 동양의 여왕(Queen of the Orient) 이라고도 불리는 마도(魔都)였다. 상하이는 뉴욕을 제외하고는 고층 건물이 가장 많은 동양 제일 도시로 꿈 많은 젊은이들의 선망의 도시였다.

세계의 부(富)가 모이는 뉴욕 런던과 함께 세계 3대 금융 중심인 상하이의 마천루는 세계의 인재를 끌어 왔다. 당시 하바드대학 졸업자가 미국 이외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 상하이라고 하였다.

1930년대 중국 산시성(陝西省) 옌안(延安)에 칩거하고 있는 중국 공산당 지도자를 처음 인터뷰한 서양인이 있었다.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이라는 책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어 세계에 널리 알려진 에드거 스노우(1905-1972)다. 그는 본래 미국 미주리 주 캔자스 출신으로 대공황 직전에 주식으로 큰돈을 벌어 세계 일주 여행을 나섰다.

그가 상하이에 와 보고는 동서(東西)와 고금(古今)이 혼재된 이 도시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는 더 이상 여행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상하이에 주저앉아 기자가 되었다. 그리고 상하이 미국 영사관의 직원이었던 미모의 헬렌 포스터(1907-1997)와 결혼한다. 헬렌 포스터는 님 웨일즈의 필명으로 중국 대륙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 김산(金山)을 인터뷰하여 “아리랑( Song of Ariran)”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인디아나 존스와 상하이

상하이의 찬란한 마천루의 뒷골목에는 아편 마약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모여 든 여행객을 노린 어둠의 나이트클럽과 갱단에 의한 폭력이 끊어지지 않는 곳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인디아나 존스”영화에서 1930년대 인디아나 박사가 누루하치의 유골과 다이야몬드를 거래를 하려다 상하이의 갱단에 쫓기는 장면에서 당시 상하이의 뒷골목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한편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대한민국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국제도시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만들었다(1919). 그러나 일본은 외국의 조계지를 보호막으로 치외법권의 그늘에 숨어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지사를 잡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또한 외국의 자본이 들어와 노동자 착취에 반발하여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대두되고 이러한 풍토위에 처음으로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곳도 상하이였다(1921). 상하이는 부(富)를 추구하는 서양인과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조선과 중국의 항일 애국지사들이 모여 든 곳이기도 하였다.

치라이(起來)! 풍운아녀

일본은 1931년 9월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동북3성을 유린하고 1932년 1월28일 다시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남 중국을 위협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에 난징(南京)과 상하이의 국민당은 항일보다 오히려 항일을 주장하는 공산당을 잡아들이는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장제스(將介石)는 “일본은 피부병에 불과하지만 공산당은 심장병”이라는 유명한 말로 피부병은 귀찮지만 죽지는 않는데 심장병은 자각증세 늦더라도 죽음을 가져온다고 경고하였다.

국민당의 백색테러로 애국적인 공산당원은 지하로 농촌으로 숨어들었다. 중국의 허리우드라는 상하이에 많은 예술인들은 연극과 영화로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35년 개봉된 “풍운아녀(風雲兒女)”라는 영화는 이러한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주제가인 “의용군 행진곡(義勇軍 進行曲)”의 가사를 지은 텐한(田漢)은 국민당에 체포되어 난징의 헌병대에 수감되었다. 지금은 중국의 국가(國歌)가 되어 13억의 중국인이 즐겨 부르는 “의용군 행진곡”의 가사만 보아도 당시 항일의 열정을 알 것 같다.

치라이!(일어나라)
노예가 되기 싫은 사람들아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만리장성을 쌓자
중화민족에 닥친 가장 위험한 시기
억압에 못 견딘 사람들의 마지막 외침

치라이! 치라이! 치라이!
우리 모두 일치단결하여
적의 포화를 뚫고
전진하자
적의 포화를 뚫고
전진! 전진! 전진! 전진하자!

텐한과 니에얼 그리고 왕런메이

텐한(1898-1968)은 고향 장사(長沙)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고등사범에 유학한 후 상하이로 돌아 와 신극(話劇)운동을 전개하였다. “로미오 줄리엣”, “햄릿”등 섹스피어의 작품을 번역 소개하고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각색 공연하였다. 그는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는
우파로 낙인찍혀 투옥되어 사망한다.

의용군 행진곡은 톈한이 감옥에서 담배갑 은종이에 시(詩)를 써서 작곡가 니에얼(?耳)에게 몰래 전달하여 곡을 붙이게 한 것이다.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출신의 천재 음악가 니에얼(1912-1935) 역시 국민당의 체포 영장이 발급된 상황이었다. 그는 의용군행진곡을 마지막으로 1935년 여름 소련으로 음악유학을 가기위해 일본 요코하마행 배를 탔다. 그는 우인(友人)이 있는 도쿄에 일시 머물고 있었다.

니에얼은 후덥지근한 도쿄의 더위를 피해 인근 가나가와(神奈川)현의 후지사와(藤澤)시(市)의 소난(湘南)해안에서 수영을 하다가 파도에 휩쓸렸다. 다음 날 그의 익사체가 발견되었다. 23세의 안타까운 나이였다. 그의 유해는 고향으로 옮겨져서 쿤밍의 서산 삼림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가 이승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낸 소난해안 공원에도 니에얼의 기념비가 있다. 니에얼로 인해 쿤밍시와 후지사와시는 그 후 자매도시가 되었다.

“풍운의 아들 딸”로 번역되는 “풍운아녀”는 텐한이 국민당의 백색 테러에 좌절하지 않고 중화 민중을 분기시켜 항일투쟁에 끌어내는 줄거리의 영화다. 당시 상하이의 대표적 영화사인 상하이 영화공사(上海電通影業公司)가 제작하였고 주연배우는 왕런메이(王人美)였다. 당시 항일 영화의 대표작이었던 “풍운아녀”의 포스타를 보면 왕런메이가 총을 어깨에 메고 민중을 궐기시키는 당당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왕런메이(1914-1987)는 텐한과 마찬가지로 장사(長沙) 출신으로 아버지는 장사 사범학교의 수학교사로 마오쩌둥(毛澤東)의 학창시절 은사의 한 분이었다.

왕런메이는 1932년 조선인으로 인기 높았던 배우 김염(金焰)과 “들장미(野玟?)“에서 처음으로 남녀 주인공으로 공연하였다. 김염은 이미 1930년 ”야초한화(野草閒花)“로 크게 히트하여 영화 황제(影帝)로 불리어질 정도 유명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이태리의 무성영화 배우 루돌프 발렌티노를 닮았다하여 ”상하이의 발렌티노“라고 불렀다. 요즈음 중국에 부는 한류열풍은 이미 1930년대 김염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박규원의 작은 외할아버지 김염 찾기

2003년 발간된 논픽션 “상하이 올드 데이스”(박규원저)를 읽어 보면 본명이 김덕린인 김염의 인생은 한편의 영화와 같다. 김덕린의 아버지 김필순은 한국의 세브란스 의대 제1회 졸업생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 동북지방의 치치하얼에서 개업하여 한인마을 이상촌을 건설 조국의 독립을 지원하였다. 이를 우려한 일본 경찰의 밀정에 의해 독살되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운명하자 생계가 막막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 졌다. 셋째 아들인 덕린은 작은 고모에게 의탁되었다. 그의 고모부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규식박사였다. 그는 김규식박사가 텐진의 베이양(北洋)대학(현 텐진대학)에 영문학 교수로 있을 때 난카이(南開) 중학을 다녔다. 덕린은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영화에 몰입 고모부 내외의 속을 썩였다고 한다. 덕린은 노신(魯迅)을 존경하여 처음에는 이름을 신(迅)으로 하였다가 불꽃같은 인생을 기대하여 염(焰)으로 다시 바꾸었다고 한다. 그는 기어이 무단가출 친구의 주선으로 상하이로 가는 증기선에 몸을 실었다.

상하이에서 영화사에 취직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면서 기회를 보고 있던 중 신극운동을 하고 있던 텐한을 소개 받게 되었다. 어느 날 “살로메” 공연 중 주인공이 극장에 나오지 않은 황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관객들은 참지 못하고 야유와 고함으로 극장이 소란스러웠다. 낭패감에 젖은 텐한이 김염을 무대 위로 급히 올려 보냈다. 즉흥적인 캐스팅이였다.

급히 분장실로 달려간 김염이 그 동안 배우들의 연습을 눈여겨 본 대로 살로메의 주인공 역할을 휼륭히 해 낸 것이다. 그러한 인연으로 김염은 상하이 공연계에 이름이 알려지고 미국에서 유학한 인테리 영화감독 쑨위(孫瑜)의 눈에 들어 “야초한화”에 주연으로 발탁되었다. 김염이 20세에 불과한 1930년도였다.

쑨-롼-김 트리오

스촨성(四川省) 중칭(重慶)에서 태어난 쑨위(1900-1990)는 텐진의 난카이 중학을 졸업하고 베이징의 칭화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영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 유학하였다. 본격적인 영화학을 공부한 그는 영화는 재미와 메시지가 필요하다면서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가 여배우로는 롼링위(阮玲玉) 남배우로는 동갑내기 김염을 발굴하여 쑨-롼-김(孫阮金)의 트리오로 1930년대 상하이 무성 영화계를 석권하였다.

김염이 “야초한화” 등에서 제대로 능력이 평가된 것도 롼링위의 완벽한 연기에 상승작용을 한 것으로 보여 진다. 야초한화로 김염이 스타의 반열에 오르고 영화 황제(影帝)로 등극하게 된 것도 본인의 재능에다 호흡이 잘 맞는 롼링위의 연기에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쑨위 감독은 김염의 연기비밀은 나라 잃은 조선인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항일정신이 영화에 그대로 투영되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중국 무성영화의 여제(女帝) 롼링위

김염이 중국 영화의 황제라면 중국 영화의 여제(女帝)는 롼링위(1910-1935)였다. 중국의 그레타 가르보(Chinese Garbo)라는 별명을 가진 롼은 16세 때 상하이 영화계 혜성처럼 나타나 많은 작품에 출연하였다. 롼링위를 빼고는 1930년대 상하이 영화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롼링위는 광둥성(廣東省) 중산(中山)사람이지만 기계공인 아버지가 일찍이 가족을 이끌고 상하이로 나와 롼링위는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가난에다 아버지마저 일찍 여윈 롼링위는 어머니를 따라 부호 장다민(張達民) 하녀로 일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녀는 쑨위 감독의 눈에 띄여 “고도춘몽(古都春夢)”이라는 영화로 일약 톱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생활은 복잡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들어간 장가집의 도움은 받았지만 장가는 어린 롼을 첩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여배우로서 명성을 얻자 롼에게 탕지산(唐季珊)이라는 부호가 접근하였다. 탕은 롼의 모녀를 위해 양옥을 준비하고 결혼 준비를 하였다. 그러자 장다민은 롼이 자신의 첩인데 탕과 다시 동거를 시작하였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롼링위는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언론의 주목받는 등 복잡한 사생활이 노출되어 고민에 빠진다. 롼은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호사가적인 세상의 인심에 좌절하여 “인언가외(人言可畏)”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불과 25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사람들은 영화가 롼을 가난에서 구해 주었지만 영화가 다시 그녀를 파멸시켰다고도 한다. “소문이란 정말 무서운 것( Gossip is a very terrible thing)”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 것이다. 홍콩의 세계적인 배우 매기 창(張曼玉)의 주연으로 롼의 일대기를 그린 “롼링위(the Actress)”라는 영화가 1992년 베르린 영화제 작품상을 받았다.

상하이 두 조선 청년: 윤봉길과 김염

일본은 1932년 상해사변에 대한 승리를 자축하고자 4월 29일 쇼와(昭和)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행사를 상하이 홍코우(虹口) 공원에서 계획하고 있었다. 윤봉길 의사는 삼엄한 경비를 뚫고 행사장 잠입에 성공, 준비해 간 사제 폭탄을 터뜨려 수많은 일본의 고관을 살상하였다. 윤봉길의 의거는 상하이에서 조선인에 대한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일본어가 능통한 조선 사람은 일본의 스파이가 아닌가하고 중국인들로부터 의심을 받아 왔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대군이 못한 일을 해냈다고 공개적으로 칭송하였다.

상하이 영화계는 윤의사의 의거에 박수를 보내면서 중국인에게 항일 애국심을 고취시킬 영화를 더욱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이 노골화되고 있음에도 국민당 정부의 미지근한 대응으로 많은 중국의 애국지사들은 국민당에 대해 크게 실망하였다. 김염은 아버지를 독살한 일본에 대한 분노는 항상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김염은 윤의사의 위대한 업적에 감명을 받고 방법은 다르지만 영화로 통해 항일을 하였는지 모른다.

1933년 연말 김염과 왕런메이가 소속된 롄화(聯華)영화사의 망년회가 있었다. 렌화는 홍콩의 화교재벌 허둥(何東)이 만든 영화사였다. 1934년 해피 뉴 이어로 넘어가는 자정의 시보가 울리자 쑨위 감독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돌연 김염과 왕런메이의 결혼을 선언하였다. 서프라이즈였다. 롄화의 망년회 파티가 세기의 두 남녀 배우의 결혼파티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1934년은 김염으로서는 희비가 엇갈리는 해였다. 그는 쑨위 감독의 “따루(大路)”’라는 영화에 출연하여 힛트를 시켰다. "따루“는 항일 전사들을 위한 길을 만드는 작업 근로자들과 관련된 내용으로 항일 영화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니에얼이 작곡한 ”따루“의 주제가 ”위대한 길의 노래“는 지금도 중국인 사이에서 애창되고 있다. 니에얼이 일본에 가기 1년 전의 일이었다. 그 해 김염은 왕런메이와의 사이에서 첫 아들을 얻었으나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두 젊은 부부를 애통에 빠지게 한다.

“나의 외할아버지 중국 영화계의 황제 김염을 찾아(尋?我的 外公 中國電影皇帝 金焰)”이라는 긴 제목의 책이 2009년 중국에서 발간되었다. 박규원 작가가 쓴 ”상하이 올드 데이스“의 중국어 번역본이 나온 것이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박규원 작가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통해 세브란스 의대 1회 졸업생이었다는 외증조할아버지 김필순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작가의 연로하신 어머니가 주변의 자료를 모아 KBS의 일요스페셜 팀에 김염을 소재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볼 것을 권유하였다고 한다. 흥미를 느낀 KBS 일요스페셜 팀이 중국으로 출장 가서 김염의 자료를 찾아보던 중 김염이 대단한 인물임을 알고 놀랬다고 한다. 박규원 작가는 이에 자극을 받아 후손으로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은 외할아버지 김염의 일생을 밝혀내기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작가는 작은 외할아버지 김염을 찾고자 8년에 걸쳐 중국 미국 카나다에 흩어져 있는 외가 가족들을 인터뷰하여 ‘상하이 올드 데이스’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작품의 우수성으로 2003년도 ‘논픽션상’ 대상까지 받았다. 미국의 작가로 “뿌리(Roots)”를 집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게 한 알렉스 헤일리(1921-1992)를 연상케 한다.

1937년 7월7일 일본은 중국침략의 마각을 완전히 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일본이 중국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다. 일본의 침략이 피부병에 불과하다는 장제스는 당황하였다. 상하이는 더 이상 로맨틱한 국제도시가 아니었다. 상하이의 “해피” 올드 데이스도 끝났다. 일부 조계지역을 제외하고 중국인에 대한 일본의 잔혹한 통치가 시작되었다.

항일의 만리장성(萬里長城)

박규원 작가의 논픽션에 의하면 김염등 상하이의 항일영화 제작자들은 더 이상 영화를 통해 항일 운동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영화 감독들은 메가폰 대신 총을 들고 전선으로 가야 했다. 김염도 전투기 조종사가 되고 싶어 난징에서 시험을 쳤지만 낙방하였다고 한다. 1938년이 되자 일제가 상하이의 영화계를 접수하면서 최고의 배우 김염에게 일중합작영화에 출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달라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원수인 일제에 협력할 수 없었다.

김염은 일본 영화사의 끈질긴 요청을 피해 홍콩으로 몸을 피하였다. 그리고 쿤밍의 국민당 정부의 요청으로 왕런메이와 함께 “장공만리(長空萬里)”라는 영화를 찍었다. 이 영화가 김염-왕런메이 부부의 마지막 공연 작품이었다.

1941년 일제가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일본군이 홍콩 카이탁 공군기지를 기습 공격한다. 그리고 구룡(九龍)반도를 통해 홍콩으로 침략해 들어 왔다. 그리고 불과 3주후 크리스마스의 이브 날 영국의 홍콩 지배 100주년의 기념 파티장이었던 페닌술라 호텔의 희미한 촛불아래 일본군은 영국 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낸다. 이제 홍콩도 안전한 곳이 아니다.

친이(秦怡)와 김염의 최후

김염등 항일지사들은 홍콩을 떠나야 했다. 1942년 1월 광둥성을 거쳐 4월에 구이린(桂林) 5월에 국민당 정부가 있는 중칭에 도착하였다. 수개월 꼬박 걸어서 이동했다. 김염은 전쟁의 와중에 왕런메이와의 결혼생활 유지가 어려움을 알고 1944년 이혼하였다. 그리고 1947년 일본군이 물러 간 홍콩에서 영화배우 친이와 재혼하였다. 주례는 중국의 유명한 문학자 궈모뤄(郭沫若)였다. 궈모뤄는 두 사람의 부부 배우가 나란히 발전해 나가 길 기원하는 휘호 “은단쌍성비익쌍비(銀檀雙星比翼雙飛)”를 써 주면서 축하하였다. 이듬 해 6월 그들의 유일한 혈육 아들 첩(捷)을 얻었다.

친이(1922- )는 상하이 출신으로 은막의 4대 여배우의 한사람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일찍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친이를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평가하였다. 친이는 1939년에 결혼 딸 하나를 두고 이혼하였다가 김염과 재혼한 것이다. 친이는 김염이 죽을 때 까지 옆에서 지켜 준 사람으로 2009년 중국 부녀회에서 중국 역사상 10대 여걸의 한사람으로 친이를 선정한 바 있다.

김염은 신 중국 건국 후 아들과 부인 친이와 함께 상하이에 거주하면서 1983년 12월 27일 73세의 나이로 상하이의 화동병원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의 영화 황제가 되는 등 불꽃같은 삶을 산 김염이 독립된 조국을 다시 밟아 보지 못하고 마지막 눈을 감은 것이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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