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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증 12개 손맛, 유기농 100% 장맛 … 반찬이 먹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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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5일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모래내시장에 있는 반찬가게 ‘춘향이와 이도령’ 앞에서 전통요리연구가 허윤숙 사장이 유기농 재료를 이용해 직접 만든 오이소박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오종택 기자]

시장통을 향해 비스듬하게 놓인 좌판 위로 주방용 랩을 쓴 스테인리스 그릇 20여 개가 놓여 있다. 그릇마다 멸치조림·콩자반·고추절임·총각무 같은 반찬이 담겨 있다. 가게 내부 한쪽 벽에 유리문이 달린 냉장고가 놓여 있고, 그 안에 또 각종 반찬이 들어 있다. 5일 찾아간 인천 모래내시장 ‘춘향이와 이도령’은 밖에서 보기엔 여느 반찬가게와 다를 바 없었다. 30㎡(9평) 남짓한 가게 크기에 비해 비교적 큼지막하게 얹혀진 하얀색 간판과, 그 한 귀퉁이에 앙증맞게 그려진 한복 입은 신랑·각시 캐릭터 정도가 시선을 끌었다.

 그런데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니 놀랄 만한 점이 한두 가지 아니다. 우선 80여 가지나 되는 반찬 종류가 눈길을 끈다. 갓김치·파김치 같은 김치류부터 문어볶음·쥐치포무침·꽁치찜에 각종 나물, 명절 때 자주 먹을 법한 각종 전까지 없는 반찬이 없다. 반대쪽 벽면을 보고는 한번 더 놀란다. 한식·양식·중식·일식에 제과·제빵, 주조(칵테일)·복어 등 조리 기사·기능사 자격증 12개가 빼곡히 걸려 있다. 이 밖에 각종 수료증, 그리고 ‘2012년 지식경제부 장관 표창장’까지 30여 개의 액자가 벽면을 도배하듯 메우고 있다.

 자격증의 주인공이면서 이들 반찬을 직접 만드는 이는 허윤숙(42) 사장이다. 허 사장은 대학 졸업 후 13년간 요리학원 강사로 일하다 2007년 6월 오래도록 꿈꿨던 사업에 뛰어들었다. 서른여섯 살 때였다. 어린 시절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던 모래내시장에 가게를 냈지만 사업 초기엔 순탄치 않았다. 허 사장은 “처음 3년 동안은 하루 두세 시간만 잤다”고 말했다. 장사하고 음식을 만들다 보면 오전 3시쯤 됐는데 그때 퇴근했다가 여섯 시면 또 출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장 중심 통로에서 비켜나 이면 도로를 접하고 있는 이 가게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옆집 청과물 가게 앞에 어른 키보다 높이 쌓여 있는 과일상자가 허 사장네 가게를 가렸다. 상가 주인이 “이 자리에서 6개월 이상 장사한 사람이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허윤숙 사장이 취득한 각종 기사·기능사 자격증 12개와 표창장.

 허 사장은 강사 경험을 살려 오는 손님마다 일일이 잡고 음식 조리법을 설명했다. 다른 음식들과 어떻게 다른지, 어떤 정성을 기울였는지, 건강에 얼마나 좋은지 상세히 설명했다. ‘맨투맨 강의’식 세일즈는 맛과 영양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허 사장이 만드는 음식에는 화학 조미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춘향이와 이도령’네 주방에는 미원·다시다·캐러멜·빙초산·신화당·뉴슈가 같은 조미료가 아예 없다. 허 사장은 “된장·고추장·청국장·조선간장·매실액 등을 전부 유기농으로 직접 담그고 이들을 이용해 장아찌·오이지·짠지·깻잎·마늘짱아찌 등을 직접 담그기에 화학 조미료를 쓰지 않아도 어떤 맛도 낼 수 있다”며 “덕분에 더 깊고 은근한 맛을 내면서도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고추와 함께 빨갛게 볶은 멸치조림을 먹어봤다. 매콤하게 입에 착 달라붙지만 입안을 찌르듯 자극적이지는 않다. 코다리찜도 담백한 생선살과 짭조름한 맛이 잘 어울리지만 짠 음식 특유의 입안을 쥐어짜는 느낌은 없다.

 개업 후 3년이 지나면서 슬슬 손님이 늘면서 단골도 생겼다. 만들어야 할 음식 양이 많아지자 허 사장은 급히 항아리 확보에 나섰다. 장이나 짠지류는 묵은 항아리에 담글수록 맛이 깊다. 그런데 50년쯤 된 항아리는 가격이 개당 100만원을 오르내려 살 엄두를 못 냈다. 그러던 중 한 손님으로부터 인근 수도원에 묵은 항아리 80여 개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 사장은 무작정 찾아가 신부님께 몇 개만 내어달라고 청했다. “가보 같은 항아리들이고 요긴하게 쓰는 중이어서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튿날 허 사장은 편지 한 통을 써 들고 다시 수도원을 찾아갔다. “천재 첼리스트 장한나도 좋은 첼로가 있어야 훌륭한 연주가 나옵니다. 저도 좋은 조리 기술이 있지만 발효가 잘되는 좋은 항아리가 있어야 제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

뒤뜰에 놓인 항아리 40여 개에는 직접 담근 고추장·간장 등이 가득 차 있다.

 신부님이 부재 중이어서 편지를 맡겨 두고 왔는데 한 달쯤 뒤 전화가 왔다. 신부님은 “내일 와서 땅속에 묻힌 항아리 하나를 파서 가져가시라”고 말했다. 이튿날 신부님은 삽으로, 허 사장은 호미로 흙을 팠다. 성인 허리춤에 올 정도로 큰 항아리를 파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열심히 호미질을 하는 모습을 본 신부님은 항아리 하나를 더 내주었다. 이 항아리로 담근 간장·된장은 맛이 한결 깊었다. 그리고 1년 뒤 신부님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수도원을 리모델링한다. 항아리가 필요 없게 됐다. 전부 가져가시라.” 이곳에서 받아온 항아리 60여 개는 지금 ‘춘향이와 이도령’ 가게 뒤뜰과 지하 저장고에 각종 장류와 장아찌를 담고 빼곡하게 놓여 있다.

 입소문이 나면서 ‘춘향이와 이도령’은 모래내시장 명물이 됐다. 올 6월 롯데백화점 구월본점이 마련한 ‘전통시장 특별전’은 또 다른 기회가 됐다. 허 사장네 판매대에 손님들이 줄을 잇자 백화점 측은 이번 추석 음식 세트에 전과 나물을 공급해 달라고 제안해 왔다. 하루 3만~4만원으로 시작한 매출이 많을 땐 100만원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하고 종업원 두 명과 아르바이트생을 쓸 정도로 성업이지만 허 사장은 마음 한쪽이 허전하다. 새로운 요리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그는 “음식을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한식 조리법을 발굴하고 보전하는 건데 그걸 못하고 있다”며 “전국 방방곡곡 할머니들이 전부 한식 요리 전문가들이신데 이분들의 노하우를 배워 책으로 써 전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한식 조리법 보전 외에 장기 계획이 하나 더 있다. 2015년께 강화도에 전통 음식 아카데미를 열 계획이다. 한쪽에서 직접 유기농으로 농작물을 재배하고 다른 쪽에는 대형 장독대를 만들어, 이 작물로 담근 각종 장류를 담가 둘 생각이다. 제조 과정을 공개해 관광상품화하는 한편 음식 조리법도 전파할 계획이다. 장래 포부까지 듣고 나오다 미처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전북 남원과 무관한 인천 토박이면서 왜 상호명을 그리 붙였느냐는 거였다. 허 사장은 “춘향전은 내가 아는 가장 예쁜 사랑 얘기”라며 “그들의 변함없는 사랑처럼 내가 만든 전통 장맛도 오래도록 변치 말자는 다짐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나도 그런 예쁜 사랑도 해보고 결혼도 하고 싶다”며 미소를 지었다.

한약방 취업해 식재료 공부 … 명함엔 사장 대신 전통요리연구가

이갑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인천에서 가장 큰 모래내시장에 있는 반찬가게 ‘춘향이와 이도령’. 시장을 가로지르는 길쭉한 길 양쪽에 눈에 띄게 자리 잡은 점포도 아니고, 지나가다 시장 내 골목으로 눈을 돌려야 보이는 작은 가게다. 그런데도 알음알음 입소문을 통해 맛과 정성·청결함이 알려지면서 손님들의 발길이 빠르게 늘고 있다.

 허윤숙 대표는 ‘성공은 끊임없는 학습에서 나온다’는 말을 몸으로 실천하는 좋은 사례다. 허 대표는 대학에서 조리학을 공부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여대에서 식품학과를 수료한 학구파다. 반찬가게를 열고 나서 3년간 직접 농사를 지어 식재료를 조달한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몸에 좋은 식재료를 찾기 위해 한약방에 취직해 7개월간 한약재를 연구하기도 했다. 최근엔 한국농수산대에서 농산가공학·농촌관광학 등 3개의 코스를 수료하기도 했다.

 허 대표는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화학 조미료 없이도 깊은 맛을 낸다. 건강에 좋지만 맛이 없으면 하수(下手)라는 것이다. ‘전통요리연구가 허윤숙’이라고 적혀 있는 그녀의 명함은 비단 반찬가게의 최고경영자(CEO)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전통요리 분야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남다른 열정과 자부심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좋은 재료와 기교를 부리지 않은 우직한 정성에서 우러나온 맛을 고객은 안다. 허 대표는 2012년 전국소상공인대회에서 지식경제부장관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춘향이와 이도령’은 점포가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반찬가게는 신선도가 생명이다. 아무리 맛있는 반찬을 만든다 해도 고객에게 청결함을 주지 못한다면 지속적으로 사랑받기 어렵다. ‘춘향이와 이도령’ 점포 한 면에는 큼지막한 냉장실이 있다. 반찬을 맛있게 만드는 것 못지않게 신선하고 청결하게 유지하는 데도 정성을 쏟는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냉장실이 아닌 일반 판매대 위에 놓여 있는 반찬들도 비닐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찾아온 손님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작지만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허윤숙 사장의 반찬 철학

▶“반드시 천연재료를 쓴다”
- 식재료 고유의 풍미를 살려 음식 맛을 낸다.
기교를 부린 음식으로 잠깐 성공할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음식 조리는 휴머니즘을 실천하는 일이다”
- 고객이 얼마나 건강해질까를 생각하며 만들고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이도 부담 없이 사 먹을 수 있는 값을 받아야 한다.
▶“전통 장류에 대한 지식과 노하우를 확산시켜야 한다”
- 한국 고유의 음식 조리법은 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다. 전통은 이어져야 한다.

인천=박태희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이갑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중앙일보·삼성경제연구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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