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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도 100% 자연의 소리, 슈베르트를 꺼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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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백건우씨는 ‘슈베르트의 밤’ 연주 곡목을 “청중이 그냥 순수하게 소리만으로 들어주시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러면 아마도 이 프로그램이 굉장히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베토벤, 브람스를 거쳐 이번에는 슈베르트다.

 피아니스트 백건우(67)씨가 낭만주의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의 피아노곡을 들고 돌아왔다. 한 작곡가를 붙들고 몇 년씩 깊이 파 들어가 자기 음악을 만드는 그의 스타일 덕에 백건우 팬은 기다림에 익숙하다. 해묵은 간장처럼 작곡가가 원한 100% 순도의 소리를 걸러낼 때까지 그는 건반 위에 몸을 기울이고 음을 찾는다. 슈베르트는 그에게 어떤 울림으로 다가왔을까.

즉흥곡·소품집 …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곡

5일 나온 백건우의 슈베르트 음반.

 “평화스럽고 아름답고, 자연이 그대로 음악에서 흘러나와요. 베토벤이나 브람스는 뭔가 싸우고 투쟁하는 요란스런 과정을 거쳐야 어떤 지점에 도착하잖아요. 슈베르트는 아무 액체도 섞이지 않은 맑은 소리 그 자체에요.”

 ‘슈베르트의 밤’이라 할 독주회 프로그램은 함께 내놓은 음반 ‘슈베르트: 즉흥곡, 클라비어 소품집, 악흥의 순간’(도이치그라모폰)에 담겼다. 그는 이 곡들을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 독주곡’이라 불렀다. “새삼 음악이 너무 아름답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담담하고 과묵한 백건우씨의 입에서 ‘아름답다’는 말이 잇따라 흘러나왔다.

 “슈베르트는 자기 음악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곡 자체로 충분히 가치가 있고 아름답죠. 자기 완결성이 또렷해요. 쇼팽이나 슈만과는 또 다르게 피아노 독주만이 들려줄 수 있는 아름다움의 고갱이를 탄생시켰어요.”

 이번 독주회는 중간 휴식시간 없이 하나의 여행처럼 흐름을 탄다. 즉흥곡 1번으로 출발해 피아노 소곡으로 갔다가 ‘악흥의 순간’ 두 곡을 거쳐 다시 즉흥곡으로 왔다가 피아노 소곡으로 되돌아간 뒤 즉흥곡과 ‘악흥의 순간’으로 끝난다.

 “이 프로그램은 오래 전에 만든 건데 여러 나라로 연주 여행을 다니면서 서랍에 넣어두었던 거예요. 꺼내서 다시 보니 너무 마음에 들고 아름다워요. 느낌 오는 데로 건반에 손을 올렸죠.”

CD 아닌 LP 같은 소리 빚고 싶어

 그는 슈베르트가 남긴 가장 슈베르트다운 곡들을 모아 하나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생각으로 연주곡목을 짰다고 했다. 피아노 소리로 그려가는 슈베르트의 얼굴은 어떻게 드러날까.

 “작곡가가 들었던 그 소리, 그 음악 그대로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른 액체가 섞이지 않은 맑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게 가장 어려운 숙제에요. CD 말고 LP 같은 소리.”

 슈베르트는 생전에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채 곤궁한 처지로 지내다가 31살 짧은 삶을 마감한다. 가난해도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고 친구들도 많았다. 사람들을 향한 슈베르트의 고운 마음은 그가 가곡을 다수 남긴 점에서도 엿보인다. 그의 음악을 듣기 위한 정기 모임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에서 슈베르트가 그랬듯, 백건우씨도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과 나누는 교감을 강조했다.

 “슈베르트가 죽고 나니 우리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더 사무치잖아요. 당대에는 푸대접을 받아 서글펐겠죠. 자신의 음악이 사랑받는 걸 그가 알고 갔으면 좋았겠지만 인생이 또 그런 거니까. 그렇게 남긴 음악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

당대엔 푸대접 … 인생은 그런 것

 배우인 부인 윤정희(69)씨가 옆에 있다가 “왜 그 얘기 좀 하지 그래요” 하며 지난 3월 이스라엘 연주회 때 겪었던 감동을 들려줬다.

 “지휘자 주빈 메타의 초청으로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등지에서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4번을 연주했는데 마침 간 날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성 금요일’이었어요. 낮 12시에 시작한 콘서트를 끝내고 차를 타고서 골고다 언덕에 올라갔더니 딱 3시에요. 바로 예수가 숨을 거둔 그때요.”

 백건우씨는 그 순간이 “신비스러웠다”고 했다. 그가 음악의 순례자로 작곡가의 영혼을 만나는 길이 그러한 것인가 싶었다.

 ◆백건우 피아노 리사이틀=슈베르트 4개의 즉흥곡, ‘악흥의 순간’ 중 2·4·6,번, 3개의 피아노 소곡. 6일 오후 8시 강동아트센터 대극장, 7일 오후 7시 여수 예울마루, 10일 오후 8시 대구 아양아트센터, 14일 오후 7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02-599-5743.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1797~1828)=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 가곡만 600여 곡을 작곡해 근대 독일 가곡의 창시자로 불린다. 교향곡 제8번 ‘미완성’, 현악 사중주 ‘죽음과 소녀’, 피아노 오중주 ‘송어’, 가곡집 ‘겨울나그네’ 등 대표작품에 드러난 풍부한 시적 정취의 표현으로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꼽힌다.

글=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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