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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장칭이 鄧 당적 박탈 요구하자 “그는 지도자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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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호 29면

마오쩌둥이 한때 후계자로 염두에 뒀던 덩샤오핑(오른쪽)과 마지막 후계자로 선정한 화궈펑(왼쪽). 천하의 마오쩌둥도 결국은 능력 있는 사람보다 말 잘듣는 사람을 선택했다. 1950년대 말, 덩샤오핑이 당 총서기였을 때 화궈펑은 현(縣)서기에 불과했다. [사진 김명호]

1949년 1월 베이징에 입성한 중국 인민해방군은 천안문광장을 새로 단장했다. 아무리 대형 사건도 천안문광장에서 시작과 종지부를 찍어야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었다. 신중국의 개국 선언과 문혁 초기 세계를 놀라게 한 여덟 차례의 홍위병 열병식도 천안문광장에서 거행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37>

광장은 부메랑이다. 만든 사람의 심장을 겨누는 장소로 둔갑하곤 한다. 천안문광장도 예외가 아니다. 1976년 4월 5일을 전후해 천안문광장에서 일어난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는 신중국 변신의 계기였다.

4인방은 생전의 저우언라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를 대신해 국정을 총괄하던 덩샤오핑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죽은 사람은 비판할 가치도 없다”며 포화를 덩샤오핑에게 집중시켰다.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신문잡지와 비(非)관방 선전기구를 동원해 반혁명 분자 덩샤오핑을 비판하자”고 제안했다. 덩샤오핑은 끄떡도 안 했다. 장칭(江靑)은 발을 동동 굴렀다. ‘매국적(賣國賊)’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저우언라이 사후 총리대리에 임명된 화궈펑에 대해선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며 무시했다.

덩샤오핑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덩샤오핑에 관한 문제는 내부모순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지시 때문이었다. 1937년 7월 마오쩌둥은 옌안의 항일군정대학 강의에서 모순을 외부모순과 내부모순으로 구분한 적이 있었다. 외부모순은 적과 발생하는 모순이지만 내부모순은 자아비판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4인방은 마오와 화궈펑을 설득하지 못했다. 장칭은 마오의 지시에 반발했지만 화궈펑은 마오의 말이라면 무조건 준수했다.

덩샤오핑 비판에 광분하던 시기의 장칭(江靑). 1975년 10월 3일 다짜이(大寨).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정도가 지나치면 해가 되는 법. 장칭의 덩샤오핑 비판은 도리어 4인방에게 상처를 안겨줬다. 외국 언론들도 비슷한 보도를 했다. “베이징 거리에 덩샤오핑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셀 수 없이 나붙었다. 덩샤오핑이 한 말들이 맨 앞을 장식했다. 대자보를 본 군중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덩샤오핑의 4인방 반대 투쟁도 진전이 없었다. 화궈펑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을 공격했다. 주석의 혁명노선에 배치된다. 엄중한 착오를 범했다.”

천안문광장에 운집한 군중들은 연일 저우언라이를 찬양하며 장칭과 4인방에게 독설을 퍼부어댔다. “모두 힘을 합해 악마를 제거하자. 저우언라이 총리는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다.” 4인방을 이리와 늑대에 비유하고 장칭을 “황제를 꿈꾸는 미친 여자”라고 매도했다.

4월 4일 오후, 사태 대응을 위한 정치국 회의가 열렸다. 시위자들에게 동조하던 예젠잉과 리셴녠은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연락관 마오위안신이 나타나자 화궈펑이 회의를 주재했다. 베이징 치안 담당자가 입을 열었다. “1400여 개의 직장에서 보낸 2073개의 화환이 광장을 뒤덮었다. 6m짜리도 있다. 시위자들은 덩샤오핑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대부분이다.” 장칭은 “해가 지면 화환들을 수거해 소각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화궈펑도 동조했다. 대형 트럭 200대가 광장에 들이닥쳤다.

날이 밝자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10만 명을 웃돌았다. 텅 빈 광장에 분노한 시위대는 “화환을 돌려달라”며 인민대회당으로 몰려갔다. 중앙정치국도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그간 참석을 거부하던 덩샤오핑도 비판을 받겠다며 모습을 나타냈다. 4인방의 일원인 장춘차오는 덩샤오핑을 1956년 헝가리 민중봉기를 주도했던 ‘임레 나지(Imre Nagy)’의 중국판이라고 비난했다. 마오위안신이 덩샤오핑을 비판하는 마오쩌둥의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덩샤오핑은 고개를 떨군 채 침묵했다. 부주석 왕훙원은 마오쩌둥의 지시를 전달했다. “10만 민병을 동원해 진압해라.”

오후 6시30분, 정치국 성명이 광장에 울려퍼졌다. “아직도 회개를 못한 주자파(走資派)가 당에 잠입했다.” 덩샤오핑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 10시30분, 광장이 암흑으로 변했다. 시위자들에게 30분간 시간의 여유를 줬다. 11시가 되자 광장에는 100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출동한 민병들은 100여 명을 체포했다. 사망자는 없었다. 천안문광장의 사태를 보고받은 마오쩌둥은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옆에 있던 문건 관리자에게 심회를 피력했다. “민중의 만세 소리를 듣던 곳이 성토장으로 변했다. 죽으면 역사의 심판을 피하기 힘들다.”

4월 6일 다시 정치국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시위가 계획적이고 조직적”이라고 단정했다. 4인방은 마오위안신을 마오쩌둥에게 보냈다.

조카로부터 회의 결과를 들은 마오쩌둥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나도 무슨 음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덩샤오핑이 막후에서 시위를 조정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권한을 행사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날 밤, 장칭이 마오쩌둥에게 달려갔다. 덩샤오핑의 당적 박탈을 요구했다. 마오는 거절했다. “나는 민심을 잃었다. 저우언라이는 백성들 마음에 영웅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사건 때문에 덩샤오핑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 자격을 갖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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