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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협상, 기싸움선 이기고 회담장선 밀리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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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다음달 25일 금강산에서 열리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의 1차 후보자로 추첨된 실향민이 25일 서울 중구 대한적십자사 이산가족 신청 접수센터에서 사진을 제출하고 있다. 대한적십자사는 다음달 16일 상봉 참가자 100명을 최종 확정할 방침이다. [김상선 기자]
이영종
정치부문 기자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한 겁니다. 답답하면 직접 대북 협상을 해보세요.”

 추석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판문점 적십자 회담이 막 타결된 지난 23일 밤. 세종로 정부 서울청사 3층 기자실에서 브리핑을 하던 통일부 당국자는 ‘미흡한 협상’이 아니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공직자가 국민과 언론에 ‘네가 한번 해봐라’는 식으로 말하는 건 문제”라는 지적에 결국 당국자는 사과했다.

 브리핑 분위기가 이랬을 정도로 이산가족 상봉 합의서는 정부의 장담과 큰 거리가 있었다.

 통일부는 상봉 규모 확대를 약속했다. 또 고령 이산가족의 불편을 고려해 금강산이 아닌 서울·평양 상봉을 요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실제 오전 전체회의 때 북측에 ‘각 200명 서울·평양 상봉’ 방안을 제시하긴 했다. 하지만 결국은 ‘각 100명 금강산’으로 합의됐다. 이훈 함경북도 도민회 부회장은 “이산 상봉의 첫 단추가 낡은 외투에 꿰어지는 바람에 로또식 이산 상봉을 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이에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25일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북측에서 서울·평양으로 할 경우 100일 정도 준비기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며 “우선 이산가족들이 빨리 만나는 것이 좋겠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상봉을 확대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단숨에 접어버린 건 미덥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추석 전후’의 상봉을 제안하자 ‘시기’를 가장 먼저 고려한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협상 내용보다 대통령의 언급에 맞추는 데 치중한 것이란 뜻이다.

 지난달 6일 개성공단 정상화 당국회담 때도 통일부는 “북한의 재발 방지 약속을 받겠다”고 다짐했다. 무른 대응을 했다며 서호 수석대표를 징벌성 인사조치하고 교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곱 차례 회담 끝에 지난 14일 나온 합의서는 재발 방지 주체를 ‘남과 북’으로 담았다. 염돈재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은 “북한의 사과를 받아야 할 좋은 기회를 양비론으로 어물쩍 넘긴 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대북 협상 패턴을 두고 기싸움에선 이기고, 정작 실리는 놓치는 용두사미(龍頭蛇尾)식 협상이란 말이 나온다. 이산가족 상봉 회담 때 정부는 북한의 ‘금강산 개최’ 요구를 꺾고 판문점 남측 지역으로 회담장을 잡았다. 개성공단 회담에서도 야간협상은 하지 않겠다며 해질 무렵이면 서둘러 짐을 챙겨 북측을 압박했다. 6월 장관급 회담을 위한 남북 실무회담 때는 북측 수석대표의 급(級)을 문제 삼은 적도 있다. 그러나 합의문엔 북한 주장이 더 많이 담겼다.

 물론 단절 상태이던 남북관계를 복원하려는 정부의 어려움을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개성공단 재가동을 위해 한발 앙보하고 상봉 실무협의도 하루 만에 끝낸 박근혜정부에 점수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향후 금강산 관광 재개 협상에서도 관광객 피격사망의 책임을 개성공단 사태처럼 ‘쌍방과실’로 하자는 북측 주장이 제기되는 것에 대비해야 한다”(조영기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지적처럼 통일부에 보다 치밀한 전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가 다짐해 온 ‘새로운 당국회담과 이산 상봉의 틀’이 장담만으로 짜일 리는 없다.

글=이영종 정치부문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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