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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김경원의 자유주의적 현실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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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흥남철수작전과 1·4후퇴, 한국전쟁의 고비였던 1950년 겨울,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김경원·경석 형제는 어머님의 결단으로 어선을 타고 북한을 탈출했다. 나라의 운명과 민족구성원 모두의 생사가 경각에 달렸던 시기였다. 그로부터 60년이 흐른 작년 여름 세상을 떠난 김경원 박사의 문집 출간을 앞두고 그를 추념하며 그의 시대를 회상하게 된다.

 김경원은 누구인가. 학자·공직자·외교관으로서 당대의 뛰어난 인물이었던 그였기에 같은 시대를 살아온 중장년들의 기억 속에는 남아 있겠지만, 오늘의 젊은 세대들에겐 전쟁의 와중에 겨울바다를 넘어 남쪽으로 온 소년 김경원의 극적인 일생이 다소 생소할 것이다. 남한으로 온 그는 서울고등학교에 편입했고,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 미국 윌리엄스대학으로 유학, 하버드대학원에서 헨리 키신저 교수와 스탠리 호프먼 교수의 지도를 받아 1963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요크대학, 미국 뉴욕대학과 귀국 후 고려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다가 1975년 대통령특별보좌역을 시작으로 공직에 몸담았다. 대통령비서실장, 주 유엔 대사, 주 미국 대사를 역임한 후 공직에서 물러나 사회과학원장의 책임을 맡고 계간 ‘사상’을 창간해 한국 지성의 새 경지를 개척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김경원이 소년 시절부터 이름난 수재였으며 당대 최고의 국제정치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두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했고 냉전의 막바지 긴장과 혼란 속에서 유엔과 워싱턴에서의 외교활동을 지휘했던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정치적 관점에 따라 여러 색깔의 평가가 가능할 수 있다. 흔히 꼽는 안보강화,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란 국가목표를 평가기준으로 삼는다면 임명권자였던 두 대통령이나 그 시대를 살아온 많은 국민들은 그에게 후한 평점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북한의 독재체제를 경험했던 탈북자로서, 전체주의체제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유럽 정치사에서 심도 있게 관찰한 정치학자로서, 그리고 국제정치를 이상보다는 현실에 입각해 분석하는 대표적 리얼리스트 키신저의 제자로서 김경원이 지닌 소신이나 능력은 한 세대 전 한국에서는 높이 평가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했다.

 북한의 위협이 심각했던 안보위기 속에서 빈곤탈피의 필수요건인 산업화와 세계시장을 상대로 한 수출입국, 그리고 선진화를 고속추진하려던 권위주의체제로서는 세계수준의 두뇌와 판단력, 그리고 확고한 소신을 겸비한 김경원의 등용은 당연하면서도 행운이었다고 회고하게 된다. 다만 ‘민주화’란 입장에서 본다면, 어둡고 힘들었던 그 시대는 권위주의체제의 정통성뿐 아니라 김경원의 입지나 업적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당시 국가운영에 참여했던 지식인들이 겪었던 심리적 갈등이나 모순으로부터 김경원도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며 오히려 더 심각한 갈등에 부딪혔으리라.

 김경원에 가깝거나 그를 아끼던 사람들 가운데는 운신의 폭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던 상황에서 권위주의체제가 극단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나름대로 시도했던 그의 노력을 열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특별사면 권고, 신군부의 언론 통합 방안 반대, 6월항쟁 진압을 위한 군 투입을 예방한 미국 측 노력의 조정 등이 그러한 예다. 그러나 김경원 자신에게서 어떤 설명이나 해명을 들은 일은 없다. 퇴임 후 4강 균형외교나 동북아 세력균형 등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면서도 공직생활을 포함한 그의 일생에 대한 회고, 즉 자서전을 쓰는 것은 끝내 사양했다. 군부 주도의 권위주의체제로 말미암은 민주주의의 시련은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을 위해 치른 대가(代價)이며, 그 과정에서의 본인의 역할은 자랑할 것도 후회할 것도 없는 본인의 선택이었다는 것이 혹시 그의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의 오랜 지기(知己)인 캐나다의 폴 에번스 교수의 말대로 김경원은 자유주의적 현실주의자(liberal realist)라는 위치를 택했던 것일까.

 사실 김경원은 생각이 깊은 어딘가 외로운 내성적 인물이었다. 만약 6·25전쟁이 없었다면 그는 어린 나이부터 평양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타고난 음악적 천재성으로 북한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생의 마지막까지 한국바그너협회 회장직을 맡을 만큼 리하르트 바그너에 심취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영웅적 가능성,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비극적 운명에 대해 그는 이미 바그너와 교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