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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판 들쑤신 '랩 배틀' 기 싸움인가, 폭로전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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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개코(左), 이센스(右)

요즘 대중음악계가 시끄럽다. 스윙스·테이크원·어글리덕 등 언더그라운드 래퍼부터 다이나믹듀오·쌈디·이센스 등 유명 래퍼까지 편을 나눠 상대를 비판하는 곡을 실시간 SNS로 주고 받고 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랩 배틀’이다. 거의 ‘힙합 대전’ 수준이다.

발단은 약 2주 전 미국에서 시작됐다. 힙합의 미래로 불리는 래퍼 켄드릭 라마가 ‘컨트롤’이란 곡에서 드레이크·제이 일렉트로니카·빅션 등 유명 래퍼와의 공개 경쟁을 선언했다. 실력을 한 번 겨뤄보자는 것이다.

미국서 시작 … 한국선 스윙스가 불 지펴

한국 힙합계의 경쟁을 촉구하며 랩 배틀의 포문을 연 래퍼 스윙스.

 그리고 그 태풍이 한국에 상륙했다. 래퍼 스윙스가 ‘켄드릭의 난’에 영감을 받았다고 밝히며 21일 ‘킹 스윙스’라는 곡을 공개했다. 6분 30초가 넘는 곡의 요지는 ‘내가 왕이야. 너희들 정신 좀 차려. 힙합답게 제대로 경쟁해보자’는 것이었다.

 다른 래퍼들의 답가가 다양하게 쏟아졌다. 평소 동료 래퍼들에게 쌓여 있던 불만을 풀어내거나 스윙스와 관련한 개인적 인연을 들추기도 하고, 내가 최고라고 자부하는 래퍼도 있었다. 대중 취향에 맞는 말랑말랑한 음악으로 쏠려버린 한국 힙합에 대한 자성을 촉구하는 이도 있었다.

 그 중 슈프림팀으로 활동했던 이센스와 다이나믹듀오의 멤버인 개코의 랩 배틀이 논란이 되고 있다.

 현재 가장 주가가 높은 힙합기획사 아메바컬처에서 얼마 전 계약해지를 당한 이센스와 그 회사의 핵심인 개코 간의 대결이라는 점에서다.

 “한국힙합 후배를 위해 한 몸 다 바치듯 연기하며 사기를 치네(…) 이거 듣고 나면 대답해. 개코.”(이센스 ‘유 캔트 컨트롤 미’)

 “넌 열심히 하는 래퍼 애들한테 대마초를 줬네. 참아준 형 배신하고 카톡으로 등 돌리는 식.”(개코, ‘아이 캔 컨트롤 유’)

 23일 이센스의 개코 비판, 24일 개코의 반박, 그리고 25일 이센스의 재공격 등등 난타전에 온라인이 달아올랐다. 상대의 음악을 깎아 내리는 ‘디스(diss) 전쟁’이 펼쳐졌다. 힙합에 생소한 이들에겐 이해되기 어려운 풍경이다.

 사실 힙합은 아직까지도, 특히 한국에서는 수많은 누명과 오해, 편견을 뒤집어쓰고 있다. 특히 ‘랩 배틀’은 힙합에 대한 거부감을 야기하는 주범이다.

 랩은 미국 흑인의 투쟁적 역사와 호전적 구술 전통에서 시작됐다. 합의된 규칙 하에 음악으로 벌이는 싸움은 랩 고유의 쾌감을 만들어낸다. 상대를 이기기 위한 과정에서 더 훌륭한 표현과 기술이 나오곤 한다. 마치 링 위의 격투기를 닮았다. 래퍼들의 자기자랑과 항변, 그리고 특유의 공격적 면모를 역사적·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오직 도덕과 윤리로 재단하는 건 무모한 일이다.

 그럼에도 개코와 이센스의 랩 배틀은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 예술가의 자존심이 핵심일 법한 둘의 배틀이 음악성보다 서로를 향한 폭로와 진실공방, 일부 거친 표현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정당당 경쟁” → 인신공격으로 변질

 둘의 실력은 한국힙합을 통틀어서도 정상급이기에 관전자 입장에서는 재미있고 흥분되는 일이다. 하지만 음악보다 상대에 대한 폄하, 그리고 힙합의 본질과 관계없는 주변의 추측, 그리고 ‘음악을 통한 싸움’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싸움의 끝을 봐도 좋으며 결과는 나와 상관없다’는 태도로 사태를 몰고 가는 분위기는 확실히 걱정스럽다.

 1990년대 중반 미국에서 있었던 투팍과 비기의 랩 배틀은 힙합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사건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투팍과 비기의 랩 배틀이 짜릿했다고 해서 총격전으로 치달은 둘의 죽음까지 짜릿했던 것은 아니다.

김봉현(대중음악비평가)

◆디스(diss)=영어로 ‘존경(respect)’의 반대말인 ‘혐오(disrespect)’의 줄임말. 주로 다른 그룹이나 사람을 폄하하거나 공격하기 위한 행동, 혹은 노래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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