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자정 무렵, 흑해와 카스피해를 가르는 코카서스(Caucasus)산맥 가운데 위치한 카즈베기(Kazbegi·5047m). 그 중턱 베들레미(Bethlemi·3653m) 산장에서 ‘2013 대한산악연맹 한국청소년오지탐사대’(코오롱스포츠·중앙일보 후원) 대원 11명이 긴장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카즈베기 정상 등정이 그들의 목표다.
하늘은 밝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우박과 폭설이 쏟아졌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설은 오후까지 계속됐다. 결국, 대원들은 발길을 돌렸다. 허탈하고 아쉬운 마음에 자꾸 뒤를 돌아봤다.
오지탐사대는 카즈베기 정상을 목표로 국내에서 꼬박 석 달을 훈련했다. 11명 중 4명은 대학 산악부 소속이지만, 나머지는 산을 몰랐다. 3000m 이상 고산은 탐사대원 모두가 처음이었다.
오지탐사대는 무게 25㎏이 나가는 배낭을 메고 표고차 2000m를 극복해가며 이틀 전에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에 도착한 다음 날에는 고소 적응을 위해 4000m까지 올랐다. 대원 중에서 단 한 명도 고소증세를 겪지 않았다. 정상 등정에 대한 기대와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설 앞에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틀 만에 단맛과 쓴맛을 두루 맛본 셈이었다. 갓 스무 살을 넘긴 대원들에게는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을 터였다.
정상 등정이라는 목표에 실패해도 큰 상관은 없었다. 올해로 13년째를 맞은 한국청소년오지탐사대의 정신이 바로 도전이기 때문이었다. 도전의 가치를 배우기 위해 우리 청년은 여름마다 전 세계의 오지를 찾아 떠나고 있다.
올해 오지탐사대는 5개 팀 50명으로 꾸려졌다. week&은 올해도 탐사대와 함께 길을 나섰고, 이번에는 5개 팀 중에서 조지아 코카서스 탐사대와 결합했다. 조지아 코카서스. 이름도 낯선 곳이다. 조지아는 한때 그루지야로 불렸던 나라 이름이다. 코카서스산맥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동서로 뻗은 산줄기로, 조지아를 비롯해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등에 걸쳐져 있다. 동쪽에 유럽 최고봉 엘부르즈(Elburz·5642m)가 있으며 중간쯤에 카즈베기가 자리한다. 조지아 코카서스 탐사대는 조지아 코카서스산맥에 있는 카즈베기 등정이 목표였다.
폭설·폭풍·우박 … 정상은 한여름도 사나웠다
오지탐사대 ‘유럽의 지붕’ 코카서스산맥 등정기

조지아 코카서스 탐사대는 손병우(42) 대장을 비롯한 대원 11명으로 결성됐다. 탐사대는 지난달 13일 출국해 조지아 서부 지역을 탐사한 뒤 24일 카즈베기(5047m) 아래 스테판츠민다(Stepantsminda·1800m) 마을에 집결했다. 탐사대는 단 이틀 만에 해발 1800m에서 5047m까지 오르는 극한 체험에 나섰다.
2 기상 악화로 카즈베기 정상에 오르지 못한 대원들이 하산하고 있다.
3 하산 길 콩알만 한 우박이 쏟아졌다.
4 비가 그친 뒤 스테판츠민다 마을의 전경.
배낭 무게 25kg … 산행 30분 만에 고통 엄습
탐사대는 열흘간의 고소 적응 훈련을 마치고 정상 등정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아침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해발 1800m 게스트하우스 현관문을 열고 나온 순간, 입김이 나올 정도로 쌀쌀했다. 게다가 식량과 장비를 실은 배낭의 무게는 25㎏이나 됐다.
카즈베기 동쪽 기슭은 므크트바리(Mkhtvari)강을 경계로 스테판츠민다와 게르게티(Gergeti) 마을로 나뉜다. 마을을 잇는 다리를 건널 때쯤 카즈베기 정상이 처음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나라 지리산처럼 정상부가 펑퍼짐한 가운데, 남면으로 기이한 암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수백 년 동안 비바람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은 고성처럼 흙빛 암벽이 서 있었다.
그중에서 마치 석굴암처럼 가운데가 움푹 패고 좌우가 벽으로 둘러싸인 기암이 눈에 띄었다. 멀리서 보면 중앙에 성모 마리아를 닮은 벽이 서 있는 듯했다.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마리아 형상은 벨벳처럼 밋밋해졌다.
카즈베기의 명물은 남동쪽 해발 2200m에 서 있는 게르게티 트리니티 수도원(Gergeti Trinity Monastery)이다. 성 삼위일체 수도원으로 게르게티 사메바(Sameba), 츠민다 사메바(Tsminda Sameba)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조지아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이 수도원은 14세기에 세워졌다. 성채 두 개로 이뤄진 수도원은 해질녘이 되면 더욱 성스러운 기운을 뿜는다. 불 밝힌 수도원은 산이 아닌 망망대해에 떠 있는 등대처럼 보이는데, 가만히 보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게끔 만드는 곳이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수도원은 한 시간 남짓 거리였다. 산행을 시작한 지 30분쯤 지나자 배가영(24·해양대 4년) 대원이 배낭 무게를 못 이겨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남자 대원들이 앞다퉈 “대신 짐을 나눠지겠다”며 기사도를 발휘했다. 손 대장이 ‘3000m 이상에서도 그렇게 하는지 두고 보자’는 눈빛으로 멀찍이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배 대원의 어지럼증은 다행히 금세 사라졌다.
장엄한 코카서스산맥을 배경으로 삼은 수도원 풍경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냥 지나쳐야 했다. 풍경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날씨는 궂고 길은 멀었다. 이날 저녁까지 도착해야 할 베들레미 산장(Bethelemi Hut·3673m)은 흔히 메테오 산장(Meteo Hut)으로 불린다. 소련 시절 기후관측소로 지어진 건물로 지금은 카즈베기 등정을 위한 전초기지로 쓰인다. 표고차는 1800m, 거리는 15㎞ 정도였다.
산 중턱의 지배자는 칠순 앞둔 목동
해발 2000~3000m 지대는 야생화 천국이었다. 벌개미취와 비슷하게 생긴 코카시안 데이지를 비롯해 코카시안 나리꽃, 히말라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로도덴드론(Rhododendron) 등 어림잡아 수십 가지 꽃이 길을 수놓았다. 대부분 이 지역에서 자생하는 것이다.
야생화가 만발한 곳에는 나이 지긋한 코카시안 목동들이 있었다. 이 지역은 장수 마을로 유명하다. 일본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코카서스인의 장수 원인은 마초니(Matsoni), 즉 코카서스식 요구르트와 나이 들어서까지 이어지는 노동에 있다.
길에서 만난 베주앙도 그랬다. 멀리서 볼 때는 한창 나이의 카우보이처럼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칠순을 바라보는 노인이었다. 그는 손짓, 발짓으로 “소와 양 100마리를 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긴 막대기를 풀밭에 짚은 채 수백m 거리에 있는 소를 향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카즈베기 산 중턱을 지배하고 있었다.
해발 3000m엔 작은 샘이 있어 수통에 물을 채울 수 있었다. 수목한계선을 지나니 나무는 사라졌지만 야영하기 좋은 초지대가 펼쳐졌다. 다음부터는 빙퇴석의 너덜지대가 이어졌다. 너덜지대에 진입하자마자 짙은 산안개가 몰려와 길을 덮었다. 현지 가이드 다윗(32)이 “간격을 유지하라”고 소리쳤다.
해발 3200m 너덜지대가 끝나고 빙하지대가 시작됐다. 궂은 날씨에도 등정을 마치고 내려오는 팀을 만날 수 있었다. 독일인 남녀는 “며칠을 기다린 덕에 오늘 아침 정상에 올랐다”고 말했다. 부러울 따름이었다.
해발 3653m에 있는 베들레미 산장은 벽돌로 지은 허름한 2층 건물이었다. 카즈베기 정상부 아래 홀로 서 있는 황량한 벽돌집 외관은 ‘귀곡산장’ 분위기였고 내부는 ‘러시아 포로수용소’ 같았다. 잿빛 콘크리트 벽과 깨진 창이 음산했다. 탐사대는 매트만 깔린 방 2개에 나눠 들어가 추위를 피했다. 창문 사이로 찬바람이 파고들었다.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손 대장이 “아무것도 하지 말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 3000m 이상에서 찾아오는 고소증세 때문이다. 다행히 저녁을 지어 먹을 때까지 아무도 고소 증세를 호소하지 않았다.
갈수록 험악한 날씨 … 정상도전 꿈 접고 하산
이튿날 아침에도 다들 멀쩡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둘째 날은 고소 적응을 위한 휴식일로 정했다. 손 대장은 루트 정찰을 위해 나섰고, 나머지 대원은 고소 적응을 위해 해발 4000m 지점, 화이트 처치(White Church)를 오가며 체력을 다졌다. 그리고 오후 6시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정 시각.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나 정상 등정 준비를 했다. 아마도 대원 대부분이 정상 등정의 부푼 꿈 때문에 단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드디어 카즈베기 정상을 위해 산장을 나섰다. 그런데 자정을 넘어서면서 내린 진눈깨비가 폭설로 변했다. 게다가 바람까지 세차게 불었다. 등정 시도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지루하고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오전 6시 날이 하얗게 샐 때까지 눈은 그치지 않았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기상 상태는 오히려 악화됐다. 콩알만 한 크기의 우박이 천둥번개와 함께 쏟아붓기 시작했다.
탐사대를 비롯해 산장에 머물던 50여 명의 얼굴엔 침울한 빛이 역력했다. 산장지기는 “앞으로 사나흘은 눈이 올 것 같다”고 말했다. 손 대장은 하산을 결정했다. 대원의 심정은 그들이 내뱉는 깊은 한숨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산에서 등반대장의 한마디는 서릿발과 같은 명령이어서다.
내려오는 길에서는 ‘하산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박비는 끊이지 않았고, 하산 루트는 가스층에 가려 숨어버렸다. 3000m의 빙하길은 우박이 쌓여 있어 올라올 때보다 훨씬 미끄러웠다. 기온까지 급격히 떨어져 자칫하면 저체온증이 올 수도 있는 험악한 날씨였다. 탐사대는 손 대장을 필두로 봄날의 병아리 가족 행렬처럼 다닥다닥 붙어 하산했다. 6시간을 걸은 끝에 탐사대는 오후 8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카즈베기는 이틀 뒤 우리가 공항으로 가는 날 다시 맑게 개었다.
●카즈베기 등반 정보=현지인은 봄·가을 날씨가 가장 안정적이라고 하지만 이때는 눈이 많이 내려 실제로는 7~8월에 등반하는 사람이 많다. 안전을 위해 현지 가이드를 고용하는 게 좋다. 스테판츠민다 ‘CAFE 5047M’ 옆에 산악가이드 에이전시가 있다. 아이젠·피켈 등의 간단한 등반 장비도 빌려준다. 스테판츠민다는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서 약 150㎞ 떨어져 있으며 버스로 세 시간 걸린다. 마을에 게스트하우스·호텔 등 숙박시설이 있다. ‘레라스 게스트하우스(595-15-1968)’는 두 끼 제공에 하루 40라리(약 2만8000원)를 받는다. 베들레미 산장(bethlemihut.ge)은 미리 예약하는 게 좋다. 침상이 있는 방은 25라리(약 1만7500원), 매트만 깔린 방은 20라리(1만4000원)다. 밖에서 야영할 경우 텐트 한 동에 10라리(약 7000원)를 받는다.
코카서스(조지아)=글·사진 김영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