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위기)이 신흥국을 향하고 있다. 얼마 전까진 유럽 하늘을 뒤덮었고 4년 전엔 미국을 강타했던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이 20일 전한 미국 헤지펀드 매니저의 말이다. 미국·유럽에 이어 신흥국들이 위기에 직면했다. 모양새가 다를 뿐이다. 미국은 금융위기였고, 유럽은 재정위기였다. 신흥국은 외환위기 조짐을 보이고 있다. 외자 이탈과 헤지펀드 공격에 따른 통화가치의 추락이다.
19~20일 인도·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줄잡아 20개 신흥국의 통화가치가 약세를 보였다.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가치는 20일 다시 2%(미 달러 기준) 넘게 떨어졌다. 인도 루피화 가치는 나흘 연속 사상 최저치를 경신했다. 이들 신흥국은 주가도 일제히 곤두박질했다. 인도네시아 주가는 이날 3% 이상 추락했다.
외풍이 워낙 드세다 보니 이날 한국 원화가치도 약세였다. 코스피도 이날 1.55% 떨어져 1900 선 아래(1887.85)로 밀렸다. 일본 닛케이는 2.63% 급락한 1만3386.38에 장을 마쳤다. 현대증권 배성영 연구원은 “인도 등 경상수지 적자 신흥국들의 외환위기 가능성이 불거지면서 멀쩡한 나라 증시의 변동성도 커졌다”고 분석했다.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심리가 확산된 것이다.
무엇이 이런 사달을 일으켰을까. 달러 캐리(Dollar Carry)의 환류가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신흥시장으로 흘러들었던 값싼(저금리) 달러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계기는 미국의 양적완화(QE) 축소 움직임이다. 이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양적완화 축소 계획이 공개된 이후 미국 내 장기금리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고 전했다.
선진국-신흥국 간의 실물경제 엇박자도 자금 역류를 부추기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미국과 유럽 경제가 미약하지만 회복 흐름을 보이는 반면 신흥국 경제는 부진한 가운데 원자재 가격 하락까지 겹쳐 힘겨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미 경기회복은 자금 수요를 늘리면서 금리 상승을 부채질하고 있다.
미국 내 금리 상승은 캐리 투자자들에겐 죽음과 같은 말이다. 이자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캐리 트레이딩 수익이 가파르게 떨어져서다.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인도·브라질·인도네시아 등에 유입된 달러 캐리 자금은 최근 석 달 새 20% 가까운 손실을 봤다.
캐리 자금은 혼자 움직이는 법이 없다. 영국 투자자문사인 옥스퍼드메트리카의 로리 나이트 회장은 최근 기자에게 “달러 캐리의 역류가 시작되면 헤지펀드·뮤추얼펀드·투자은행 등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신흥국가들을 배싱(bashing·공격)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 전문가들이 말하는 ‘늑대무리의 준동’이다. 늑대들이 먹잇감을 포위해 공격하듯이 헤지펀드 등이 약점을 보인 나라(기업)의 통화나 채권을 공매도(떨어지는 쪽에 베팅)해서 그렇게 불린다. 나이트 회장은 “금융시장 늑대는 본능적으로 방어력이 약한 먹잇감을 물어뜯는다”고 했다. 바로 경상수지와 재정 상태가 나쁘고 정부의 경제운용 능력이 떨어지는 신흥국들이다.
글로벌 외환시장엔 요즘 살생부 하나가 나돌고 있다. 이른바 ‘취약한 다섯 나라(Fragile 5)’ 리스트다. 이른바 F5로, 인도·인도네시아·브라질·터키·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다. 세계 2위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가 골라낸 나라들이다.
모건스탠리는 “F5는 날이 갈수록 해외에서 자금 조달이 어려워 경상수지 적자를 메우기 힘들어 보인다”고 내다봤다. 실제 F5의 경상수지 적자는 위험수준이다. 최근 1년 동안 누적 적자 규모가 209억~882억 달러(약 23조~99조원)에 이른다. 이들 나라의 통화가치는 최근 한 달 새 2~7% 정도씩 추락했다.
그렇다고 이들 모두가 외환위기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미 투자전문지인 알파매거진은 금융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나 최근 유럽 재정위기에 비춰 그 공격은 4~6개월 정도 이어질 듯하다”며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공격에) 대응하는가에 따라 국가별 운명이 갈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강남규·홍상지 기자
◆캐리 트레이드(Carry Trade)=금리가 낮은 나라에서 빌린 돈으로 상대적으로 금리 또는 성장률이 높은 나라의 채권이나 주식 등을 사들여 수익을 노리는 머니게임. 빌린 곳이 일본이면 엔 캐리, 미국이면 달러 캐리로 불린다. 일본이 양적완화를 시작한 2001년 이후 엔 캐리 자금이 급증했다. 달러 캐리는 미국이 2차 양적완화를 단행한 2008년 11월 이후 본격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