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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국 런던 출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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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지영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지난달 영국 왕실의 ‘왕손 탄생’이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출산 바로 다음날 볼록한 배로 모습을 드러낸 케이트 왕세손비를 보면서 나는 씨익 웃었다. 일종의 동지의식이다. 나도 2년 전 런던에서 ‘나의 왕자아들’을 낳았다. 늦둥이 둘째 아이였다. 진통이 시작된 케이트 왕세손비가 들어간 후 굳게 닫힌 병원 문을 보면서 그 안의 출산 과정이 한눈에 그려졌다.

 영국에선 국가보건서비스(NHS) 체제 아래 공립병원 내 모든 의료행위가 무료다. 임신·출산과 관련해 초음파 촬영, 기형아 검사, 분만, 제왕절개 수술, 미숙아 치료, 입원비, 식사 등 모든 게 공짜란 얘기다. 물론 케이트 왕세손비가 아이를 낳은 세인트메리 병원 내 ‘린도 윙’은 하루 입원비만 1000만원이 넘는 사립 병동이다. 그러나 그 사립 병동 또한 공립병원 안에 위치해 있고, 병원 소속 의사가 두 곳을 오가며 진료를 보기 때문에 시설이나 의료 서비스 면에서 그리 큰 차이는 없다.

 영국 병원에선 임신을 하면 초음파 검사를 두 번만 한다. 임신 초기 태아가 잘 자리잡았는지 살펴보고, 5개월 때 다운증후군 여부를 가린다. 한국에서 첫아이 임신 때 매달 초음파 촬영을 하고 각종 기형아 검사까지 했던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두 번의 소중한 초음파 검사 외엔 매달 담당의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밥은 잘 먹냐, 아이는 배속에서 잘 노느냐는 등의 내용이었다. 진료 막바지엔 의사가 줄자로 내 불룩한 배의 크기를 쟀다. 의상 디자이너들이 일할 때 목에 두르는 바로 그 줄자 말이다. 무슨 1960년대 한국전쟁 직후 산부인과도 아니고, 나는 이 후진적인 산과 진료를 받으면서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과연 이곳에서 아이를 건강하게 낳을 순 있단 말인가?

 그런 불안한 마음이 싹 가신 건 아이러니하게도 수술대 위에서였다. 둘째 역시 난산이라 원치 않게 제왕절개 수술을 했다. 한국에서 첫 아이 수술을 할 때 경험이 너무 안 좋았던 나는 되레 이곳 의료진으로부터 따뜻함과 배려를 선물받았다. 수술실엔 대규모의 스태프가 들어왔다. 산과 의사 세 명, 마취과 의사 한 명, 간호사 네 명이었다. 내 손발은 수술대에 묶이지 않았다. 부분마취 때문에 덜덜 떠는 나를 위해 한 간호사는 연신 담요를 덮어주고 손을 잡아주는 등 지극정성이었다. 수술방엔 남편도 들어와 있었다. 아이는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남편과 눈을 마주치고 그 넉넉한 품에 안겼다.

 수술을 마치고 아이와 함께 병실로 옮겨졌다. 이곳에선 자연분만을 하면 산모들은 대부분 당일 퇴원한다. 오전에 아이를 낳고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은 뒤 오후쯤 퇴원하는 식이다. 케이트 왕세손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수술을 한 나는 며칠간 병원에 머물렀다. 이곳에선 산모가 아이를 24시간 직접 돌본다. 수술한 배를 부여잡고 아이를 돌봤다. 그렇게 이틀째, 젖 양이 모자라 계속 우는 아이 때문에 나는 급기야 간호사에게 부탁했다. 아이에게 분유를 한 번만 주게 해달라고. 그러나 돌아오는 간호사의 말은 북극의 만년설보다도 차가웠다. “그렇게 약한 모습 보이면 모유 수유 실패합니다. 갓난아이는 며칠 안 먹어도 죽지 않으니 그냥 놔두시구려!”

 3일 후 퇴원을 하고 집에 왔다. 영국에서 병원은 그저 아이를 낳는 곳일 뿐 산후조리와 신생아 관리는 철저하게 집에서 진행된다. 병원 소속의 산후관리사가 일주일에 한 번씩 집을 방문해 아이의 성장 상태를 확인한다. 그러곤 모유 수유를 끊임없이 독려하고 칭찬해 준다. 모유 수유를 성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 낳는 일은 어디서든 신성하다. 다만 그 과정이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가, 아니면 호들갑을 떠는가의 문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다. 런던에서 일련의 임신·출산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영국의 의료제도가 조금은 촌스럽지만 의외로 담백하고 정직하다고 느꼈다. 화려한 병실이나 최첨단 기계는 없지만 원칙과 오랜 경험이 자리했다. 반면에 한국의 임신·출산 과정은 너무 넘치는 느낌이 든다. 줄일 건 좀 줄이고 걷어낼 것은 좀 걷어내야 할 것 같다. 영국 왕실의 케이트 왕세손비도 그렇지 않았나. 아이 낳고 바로 다음날 씩씩하게 퇴원을 하면서!

박지영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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