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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암살의 불편한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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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경민
뉴욕특파원

1963년 11월 22일 낮 12시30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딜리 광장. 존 F 케네디 대통령 부부를 태운 무개차가 텍사스 교과서 창고 건물 앞을 지날 찰나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목과 머리에 총을 맞은 케네디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1시간10분 뒤 용의자 리 하비 오스왈드가 인근 극장에서 체포됐다. 그러나 이튿날 구치소로 이감되던 오스왈드는 경찰서 앞에서 나이트클럽 주인 잭 루비의 총에 사살됐다. TV를 통해 전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였다.

 50년 묵은 이 사건은 해마다 음모론의 화수분이 돼왔다. 케네디 서거 50주년을 앞두고 벌써부터 충격적인 새 주장이 쏟아지고 있다. TV방송국도 다큐멘터리 제작에 열을 올린다. 음모론을 처음 잉태시킨 건 1963년 ‘워런 위원회’의 부실 수사였다. 진보적 성향의 얼 워런 연방대법원장이 이끈 케네디 암살 조사위원회는 10개월간 수사 끝에 ‘외로운 늑대’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으로 서둘러 결론 지었다.

 당시 미국 정부로선 오스왈드의 배후에 소련이나 쿠바가 있는 것으로 알려질까 노심초사(勞心焦思)했다. 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격앙된 국민 감정을 건드려 자칫 핵전쟁으로 번지지 않을까 해서다. 그러나 부실 수사 논란이 끊이지 않자 76년 하원 조사위원회가 2년 동안 재조사를 벌였다. 조사위는 경찰관의 무전기를 통해 녹음된 당시 현장음을 찾아냈다. 분석 결과 총은 네 발이 발사됐고 오스왈드 이외 한 명의 저격수가 더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 내렸다.

 심지어 하원 조사위는 “케네디 대통령이 모종의 음모로 암살됐을 수 있다”며 “다만 음모가 누구에 의해 꾸며졌는지는 밝힐 수 없었다”고 발표했다. 음모론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91년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JFK’로 음모론이 정점에 이르자 미국 의회는 92년 케네디 암살 관련 자료 공개법을 제정했다. 2017년까지 관련 자료를 공개하도록 못 박은 거다.

 대부분 자료가 90년대 공개됐지만 미 중앙정보국(CIA)이 아직도 국익을 앞세워 공개를 거부하고 있는 자료가 있다. CIA 요원이었던 조지 조애니디스 관련 자료다. 그는 63년 오스왈드가 친쿠바 조직에서 활동할 당시 반쿠바 조직을 조종하고 있었다. 음모론자들은 조애니디스가 케네디 암살 이전부터 오스왈드와 접촉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오스왈드가 그의 첩자였거나 최소한 위험인물임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그는 훗날 하원 재조사 때 CIA 연락관으로 임명됐다. 조사를 받았어야 할 사람이 거꾸로 조사위의 핵심에 있었다는 얘기다. 2017년 조애니디스 파일 공개에 미국 정치권과 언론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과는 차원이 다른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정경민 뉴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