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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시계는 많은데 시간은 없는 우리 한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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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시에서 배를 타고 30분쯤 가면 로벤 섬에 닿는다. 지난 11일 아프리카 출장 길에 이 섬에 들렀다. 로벤 섬은 지구촌 인권운동사의 성지(聖地) 중 하나다. 넬슨 만델라(95) 전 남아공 대통령이 1964년부터 82년까지 수형생활을 했다. 섬 전체가 박물관으로 지정돼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로벤 섬은 과거 한센병 환자 수용소였다가 59년부터 주로 정치범을 가두는 감옥으로 쓰였다. 앨커트래즈이자 소록도였던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일본의 공격에 대비하는 영국군의 방어기지 역할을 했다. 버스를 타고 섬 일주 관광을 하다 보면 낡은 포대·벙커와 만난다. 잘생긴 흑인 가이드가 버스를 세우고 포대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 진지는 2차 대전 중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하는 속도가 느려 전쟁이 끝나고 2년이 지난 47년에야 완공됐다.” 그러면서 가이드가 덧붙인 말이 재미있다. “유럽인들은 시계를 갖고 있지만 우리는 시간을 갖고 있다.”

 물론 아름다운 해변 풍광과 만델라의 18년 영어(囹圄) 생활의 극심한 부조화가 가장 인상적이었지만 귀국 후엔 왠지 흑인 가이드의 짧은 조크가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나도 ‘시계는 있는데 시간은 없는’ 그런 부류가 아닌가 해서다. 그러고 보니 여름휴가를 다녀온 주변 지인들은 올해도 예외 없이 푸념을 쏟아낸다. “역시 휴가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방금 휴가를 다녀온 사람이더군.”

 부탄이나 방글라데시·나이지리아의 국민 행복지수가 한국보다 높다지만 나는 주관적 행복감에 불과하다고 본다. 우리가 이만큼이나마 살게 된 것은 자나깨나 먹고사는 일에 애면글면했던 우리 선배 세대 덕이다. 지금의 장년층만 해도 얼마 전까지는 여름휴가 일주일마저 눈치가 보여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그러니 후진국에 며칠 여행을 다녀와서 ‘시간이 멈춘 곳’ 운운하며 감탄하는 건 어찌 보면 좀 살게 된 나라 국민의 오만 내지 자기기만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유독 심한 강박증과 스트레스를 안고 산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아프리카에 챙겨간 책은 공황장애 경험자의 수기 『도중하차』였다. 일 중독자이자 잘나가는 잡지 편집장이던 저자(기타무라 모리)는 공황장애로 어쩔 수 없이 직장을 접으면서 “일의 위기에는 항상 강했지만 심신의 위기에는 둔했다”고 고백한다. 많은 분들이 이번 휴가에 분초 다투듯 일정을 잡고, 가는 곳마다 느긋하게 즐기기보다 인증샷 찍고 다음 코스로 향했을 터다. 둘레길·올레길을 전투하듯 잰걸음 놓았을 게다. 몸에 밴 중년 이상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젊은 세대에까지 물려줄 증상은 아니다. 우리도 ‘시간’을 내 것으로 삼을 때가 됐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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