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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 기자의 독도이야기] 일본 스스로 독도 영유 부정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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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독도경비대]

독도의 영유권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은 단순명쾌하다.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의 영토”이며, 따라서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고,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울릉도의 속도로 인식=145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우산과 무릉 두 섬이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산은 독도, 무릉은 울릉도를 말한다. 일본은 이 기술을 부정해 왔다. 하지만 카메라로 울릉도에서 독도를 촬영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에 의해 세종실록의 기록이 사실로 입증됐다. 울릉도에서 육안으로 독도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이 먼 옛날부터 독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사진 촬영은 커녕 독도를 눈으로 확인했다는 기록조차 없다. 독도와 울릉도 사이의 최단 거리는 87.4㎞다. 반면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오키섬과의 거리는 161㎞다.

 

◆메이지정부 "독도, 우리나라와 관계 없다”=1876년 일본의 메이지정부는 근대적 지적 편찬 사업에 착수하면서 ‘죽도(울릉도를 지칭)와 그 밖의 한 섬’(竹島外一島)을 일본 지적에 포함시킬지에 대해 5개월 동안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태정관(총리대신) 명의로 “죽도 외 일도를 판도 외로 정한다. 우리나라와는 관계가 없다는 점을 명심할 것”이란 지령을 내려보냈다. 이 가운데 ‘외 일도’가 어디냐를 놓고 논란이 있지만, 태정관 지령의 부속문서와 지도를 보면 명백하게 독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일본의 영토 편입에 앞선 대한제국 칙령=1900년 10월 27일, 대한제국은 고종 황제 명의로 반포한 칙령 41호에서 신설된 울도군의 관할구역을 ‘울릉전도 및 죽도·석도’로 명시했다. 여기서 석도는 ‘독섬’을 한자로 옮겨 표시한 것이다. ‘독’은 호남 방언으로 ‘돌’(石)을 말하는 것인데, 당시 울릉도 주민들 중에는 호남 출신 이 가장 많았다. 중요한 것은 이 칙령이 반포된 시기다. 1905년 일본 정부는 무주지(無主地)이던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삼는다고 결정했지만, 대한제국이 독도 영유를 분명히 한 것은 이보다 5년 앞섰다.

 ◆일본 패전으로 되찾은 영토=1943년 12월의 카이로선언에는 “일본은 폭력과 탐욕에 의해 탈취한 모든 지역으로부터 축출되어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옛부터 한국의 영토이던 독도 역시 카이로선언의 적용 대상으로 봐야 한다.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은 한 어부의 청원을 핑계로 이뤄졌으나, 이를 결정한 배경에는 러·일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본의 군사적 목적이 있었음이 연구 결과로 드러나고 있다.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뒤인 1946년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SCAPIN) 677호에는 독도가 일본의 통치·행정 범위에서 제외되어 있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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