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오늘 아침 광복이를 부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주철환
JTBC 대PD

광복절 아침. 유관순 누나를 생각해야 정상인데 뜬금없게도 성교육 강사로 유명한 구성애씨 얼굴이 떠오른다. 그분의 아들 이름이 ‘광복’이기 때문이다. ‘운동권’ 남편이 광복절특사로 풀려나온 걸 기념(?)해서 지었다니 역사성이 가미된 이름이다. (‘구성애의 아우성’이 처음으로 전파를 탄 1998년에 중학교 2학년이었으니 광복이도 어느덧 서른 살이 되었겠구나.)

 기억을 더듬어보자. 예나 지금이나 나를 포함한 다수의 PD들은 시청률의 노예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운 처지다. 글을 쓸 때는 다소곳이 반성하는 척하다가도 시청률표가 눈앞에 어른거리면 노예로 돌변한다. 책상 앞에선 절제를 다짐하다가도 밥상 앞에선 식신으로 바뀌는 모양새다. 직업병이라고 하기엔 궁상맞은 풍경이 꽤나 쑥스럽다.

 그 무렵 시청률의 여왕은 김혜수씨였다. 위풍당당 그녀의 행보는 드라마뿐 아니라 예능분야에서도 종횡무진이었다. ‘김혜수의 플러스유’는 동시간대 시청률 1위였다. 내가 일하던 방송사는 풀이 죽어 있었다. 이때 돌연히 나타난 잔다르크가 있었으니 이름도 구성진 구성애였다. 작가 중 한 명이 예비군교육장에서 희한한 강사를 보았던 게 사건의 시작이었다. 지루하기 십상인 그곳에서 예비군아저씨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아줌마’의 능력은 마침내 방송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노인들이 떼로 나와서 뭐 재미있겠어?” 그랬다면 ‘꽃보다 할배’는 방송을 타지 못했을 거다. “그렇게 야한 얘기를 공중파방송에서 할 수 있겠어?” 그랬다면 ‘구성애의 아우성’은 담배냄새 자욱한 예비군훈련장을 빠져나오지 못했으리라. 나랑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인연의 소유자인 최병륜PD는 과감하게 그녀의 출연을 결정했다. 속맘은 은근히 불안했을 거다. ‘혹시 욕만 들입다 먹고 시청률도 꽝이면 어쩌지?’

 방송이 나간 다음날 아침 가장 당황한 건 아마도 김혜수씨였으리라. 그쪽 시청률이 반 토막 난 것이다. 이야기의 독성, 강사의 유머센스, 그리고 메시지의 울림이 시청자를 포획하고 만 것이다. 물론 ‘결과론’이다.

 시청자게시판은 그야말로 불이 붙었다. “있는 말 없는 말 다해서 뭐하겠다는 건가”에서부터 “차마 하기 어려웠던 말을 해줘서 속이 시원하다”까지. 당시 ‘말’이라는 잡지에 인터뷰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던 나는 바로 구성애씨를 끌어당겼다. 지금의 아이돌스타보다 더 만나기 어려운 핫이슈메이커였지만 군대고참의 끈질긴 요구와 최PD의 역량이 합쳐져서 어렵사리 그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저는 성의 해방을 외치는 게 아니라 성의 가치를 부르짖고 있는 거예요. 제 강의의 핵심은 성이 사랑과 생명과 쾌락 어느 하나도 결여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죠. 지금은 쾌락만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어요. 사랑이 빠진 성은 은밀한 거래의 대상이 되어 있고, 생명존중이 사라진 성은 인격 파괴적 패륜, 혹은 놀이의 일종으로 전락하고 마는 거죠.”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다. 오히려 신종기재의 등장으로 음지의 성문화는 위기감이 고조된 상태다. 자, 그러면 어쩔 것인가. 구성애는 강의를 멈추고 다시 예전의 간호사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세상을 맑게 하는 농부다. 그녀는 여전히 논바닥에서 김을 매고 있다. “작년에 김매기 했으니 올해는 좀 쉬려고요.” 이런 철없는 농부가 있다면 수확은 물거품이다. 잡초는 쉼 없이 자란다. 세상이 잡초밭 되는 걸 누군가는 막아야 한다. 구성애가 안 하면 또 다른 구성애가 그 일을 할 것이다.

 광복절은 빛을 회복하는 날이다. 누군들 어둠의 노예가 되고 싶으랴. 하지만 형편은 어떠한가. 물질의 노예, 권력의 노예, 평판의 노예. 우리는 스스로를 감옥 속에 가두며 살고 있지 않은가.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을 보며 나는 오늘도 문답놀이를 한다. 주인으로 살기가 그리도 어려운가. 광복절에 어떤 사람은 쉬거나 놀고 또 어떤 사람은 일하고 공부한다. 누군가는 싸우러 간다. 그곳이 쉼터건 놀이터건 일터건 배움터건 싸움터건 순수함을 잃어버리면 그건 노예상태다. 부질없는 욕망의 감옥에 스스로를 감금시키지 말자. ‘아름다운 구속’은 노래방에서나 소리쳐 부르자.

주철환 JTBC 대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