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생상품 시장, 투기 잡으려다 투자 잡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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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위→5위→11위’

 한때 글로벌 톱을 자랑하던 한국 파생상품 시장이 ‘날개 없는’ 추락을 계속하고 있다. 1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2011년 세계 파생상품거래소 순위에서 거래량 기준 1위를 차지했던 한국거래소는 지난해 5위로 내려앉더니 올 들어서는 11위까지 순위가 떨어졌다. 인도·브라질·러시아에도 미치지 못한다.

 ‘자본시장의 삼성전자’라는 칭송을 받던 코스피200 선물과 옵션의 거래대금은 급감하고 있다. 코스피200 선물은 지난해(-29.5%)에 이어 올 상반기에도 전년 동기 대비 11.6% 줄었다. 지난해 30% 넘게 감소했던 코스피200 옵션도 8% 넘게 감소했다. 달러 선물과 국채 선물 거래가 다소 늘었지만 대표 상품인 코스피200 선물·옵션이 급감하면서 전체 파생상품 시장 거래량은 53%나 감소했다.

거래승수 5배로 올리자 개인 떠나

 파생시장의 급격한 위축은 기초자산인 주식 거래 감소에도 원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정부의 규제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2010년 소위 ‘11·11옵션 쇼크’로 불리는 도이체방크의 대량 매도 사건 등으로 파생상품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정부는 칼을 빼 들었다. 지난해 3월 도입한 코스피200 옵션 승수 인상이 대표적이다. 한 계약당 거래승수를 10만원에서 50만원으로 올려 거래 단위가 커지자 개인투자자들이 시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소액으로 환율 투자를 할 수 있어 한때 투자 열풍이 불었던 FX 마진 거래에 대해서도 지난해 3월 규제가 도입되자 시장은 크게 위축됐다.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가 우리나라만의 얘기는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도 위험도 높은 장외파생상품에 대해 규제의 강도를 높여왔다. 반면 우리나라는 주로 선물옵션이나 ELW(주식워런트증권) 같은 장내 파생상품에 규제의 초점을 맞춰왔다. 개인투자자들이 몰려 과열 우려가 있고, 외국계 자금이 불공정 거래를 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승수인상이나 호가제한 같은 직접적인 규제를 도입하면서 아예 파생시장의 싹을 자르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모닥불 과열됐다고 물 끼얹은 꼴”

 ELW는 고사 직전이다. 소액투자자라도 고가 우량주에 투자할 수 있는 수단으로 각광받았던 ELW는 2010년 10월 하루 평균 거래대금이 2조원을 넘었지만 최근엔 1000억원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다. 정부가 지난해 3월 스캘퍼(초단타매매자)들의 불공정 행위를 막겠다며 주요 증권사들로 구성된 유동성공급자(LP)들의 호가를 제한하자 LP들이 시장을 떠나기 시작했고, 기관의 거래 비중은 급감했다.

 문제는 이런 규제가 거래량 급감은 물론이고, 당초 기대했던 시장 정화 효과도 별로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ELW의 경우 그나마 아직 시장에 남은 개인들은 호가제한의 규제를 받지 않는 75원 미만의 저가 종목에 올인하면서 ‘걸리면 대박’이라는 투기성 투자가 횡행하고 있다. 유동성이 줄면서 통정매매(주식매매 당사자가 부당이득을 취득할 목적으로 종목·물량·가격 등을 사전에 담합, 지속적인 거래를 하는 것) 같은 불공정 거래 가능성은 더 커졌다. 한국투자증권 파생상품부 박은주 팀장은 “투자자 보호라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LP의 호가를 제한하는 식의 직접적인 규제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라 고 강조했다.

 지난해까지 10년간 세계 1위를 자랑하며 ‘세계적 히트상품’이라는 칭송을 듣던 코스피200 옵션은 “너무 빨리 컸다”는 과열론이 제기되자 규제가 시작됐다. 하지만 이런 누르기가 주식시장 침체와 맞물려 시장을 과도하게 위축시킨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차익거래 규모를 보면 지난달 거래량은 2493만 주로, 2011년 8월(3억4140만 주)과 비교해 90% 넘게 급감했다. 동양증권 이중호 연구원은 “모닥불이 과열됐다면 장작 몇 개를 꺼내든지 공기조절을 해야지 아예 물을 끼얹은 꼴”이라고 비판했다.

 파생시장의 지나친 위축은 현물 시장 위축, 더 나아가 국내 자본시장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선물시장은 현물시장의 가격을 선도하고, 현물시장의 변동성을 헤지(회피)할 수 있는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투자증권 최창규 연구원은 “외국인들이 남북 리스크가 있는 우리나라 주식을 맘 놓고 살 수 있는 것은 선물시장을 이용해 헤지를 할 수 있고,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라며 “투기적 거래를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으면 현물시장 위축이라는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외국인투자·현물시장 위축 악순환

 정부의 인허가 장벽에 막혀 신상품들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다. 현재 국내 시장에서 거래되는 장내 파생상품은 15개 종목. 시카고거래소(1258개)나 유럽거래소(254개)와는 비교도 안 된다. 지난해 2월 한국거래소는 19명의 인력으로 연구센터를 출범시켰지만 아무런 성과물을 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석유나 선박금융 등의 선물시장 도입이 시급하 지만 파생상품에 대해 공무원들이 너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 진척이 더디다”고 털어놨다.

윤창희·홍상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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