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행진」으로 이름 높은「바탄」격전지를 순례하고는「바탄」반도의 남쪽에서 원주민들이 타는「반카」(좌우에 날개가 있는 발동선)로「마닐라」만 어귀에 있는 태평양전쟁 때의 요새「코레히도르」섬으로 건너갔다. 이 요새는「마닐라」를 지키는 수문장의 구실을 하는 중요한 곳으로 옛날에 이미 중국인의 요새가 되었다가 13세기에는「이슬람」교도인 「모로」족, 13세기에는「스페인」사람이 차지하여 본격적인 요새로 만들었던 역사적인 곳이다. 그리고 19세기말에는 미.서 전쟁으로 미국이「스페인」에서 획득한 뒤 미국의「지브롤터」로 만들기 원하여 온갖 군사시설을 마련하였던 곳이다.
이 섬은 1942년에는 일본군에 빼앗겼으며 3년 뒤에는 미군이 다시 빼앗을 만큼 싸운 곳이니 이 요새는 양군의 수비와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북쪽 항구에 있는「콘크리트」부두시설도 폭탄과 폭격의 세례로 깨지고 구멍이 벌집처럼 되어 있는가하면 철근이 엿가락처럼 휘어있기도 하고 하늘에 솟아 있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듯 험상궂게 망가진 모습이 이상하게도 쇠붙이며「시멘트」따위로 만든 추상파의 조각처럼 보이는 것은 웬 일일까. 이 지상의 온갖 현상이 예술적인 그 무엇을 만드는 솜씨를 지닌지는 모르나 이 거대한 조각이야말로 한 사람의 가날픈 예술가가 빚어 만든 실내적인 작품이 아니라 수많은 병사며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만든 이른바「전쟁의 권화」란 이름의 최대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코레히도르」요새는 지하 몇백m까지 섬을 뚫어 만든 것인데 그 안에는 전쟁물자를 수없이 간직했었을 뿐 아니라 방송국, 발전소, 병원, 영화관,「테니스·코트」저수지를 마련하는가 하면 전차까지 왕래하고 미국본토와 직접 무전연락을 하게 되어있었다. 이 요새는 요새와 유원지를 겸한 곳으로 1만여 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홀로「간데라」불을 켜 가지고 이 지하요새에 들어갔다. 일본군의 공격으로「마닐라」에서 쫓겨온「맥아더」장군이 들어 있던 동굴이며 또「케손」대통령이 집무하던 곳에는 팻말만이 표시되어 있을 뿐 텅 비어있어 죽음의 세계와도 같이 조용하였다. 그런데 그때「케손」대통령과 함께 잠수선으로 이곳을 탈출하면서「맥아더」장군이 말했다는『다시 돌아오리라』라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두운 동굴을「간데라」로 밝히면서 더듬고 있는데 난데없이 여러 마리의 박쥐가 찍찍거리면서 날아다니더니 보기 좋게 머리 위에다 오줌을 깔기는 것이었다.
2차 여행 때「캄보디아」「앙코르와트」사원에서도 한밤중에 숱한 박쥐의 오줌벼락을 맞았지만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되었던 이런 음산한 동굴에서 박쥐를 만나니 소름이 끼치며 흡혈귀처럼 느껴졌다. 추리소설에 나오는 엽기적인 분위기 그대로였다.
내 머리 위를 빙빙 돌며 나를 마치 조롱하는 것 같아「간데라」를 휘둘렀으나 그들은 아랑곳없이 더 끽끽거리며 날아다닐 뿐이었다.
땅속의 격전지인 이 어두운 굴속에서 오직「간데라」볼로 비추며 여기저기 살펴보고 있는데 발에 무엇인가 채는 것 같았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 불을 비추었더니 놀랍게도 뼈다귀가 아닌가. 질겁을 할 일이었다. 그러나 무서움을 꾹 참고 자세히 살펴보니 허벅 다리뼈며 가슴뼈들도 흩어져 있었다. 아마도 태평양전쟁 때의 어느 병사의 유골인 듯. 『죽은자는 영원히젊다』란 멋진 말이 있지만 이 뼈의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기에 고이 묻히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흩어져 있는 뼈다귀들 가운데 한 뼘이나 될락 말락한 나무로 만든 불상이있고 그 옆에는 타다 남은 선향이며 또는 새 선향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가 그 전에 와서 망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분향을 한 모양인 듯.
나는 마구 흩어져있는 뼈들을 잘 추려 가지고 불상을 바로 옮겨 놓고는 거기 흩어져있는 선향을 피웠다. 그리고 이 동굴에 들어올 때「간데라」가 꺼질 것을 염려하여 마련했던 초에 불을 붙여 부서진「콘크리트」바닥에 세워 놓았다. 벽에 붙어있던 박쥐란 놈들이 찍찍거리며 촛불 위를 날았다. 무슨 주문이라도 뇌까리는 것처럼…. 나는 무릎을 꿇고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 이 뼈들이 어떤 민족의 것이라도 좋다. 과거는 묻고 싶지가 않았다. 죽은 자는 한 국가나 민족의 일원이 아니며「코즈머폴리턴」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위혼곡이라고는 찍찍거리는 박쥐의 울음소리뿐 아무도 보살피지 않는 이 버림받은 동굴이건만 촛불이 비치니 저승처럼 느껴졌다. 이 굴 속에서 나와 한참 후에 다시 굴 어귀에 다가가서 보니 촛불은 여전히 그 해골 옆에서 빨갛게 타고 있었다.